뜨거운 관심 속에 서울을 출발한 임 특사 일행 8명은 평양에 도착해서도 환대를 받았다.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등 많은 북한 인사들이 공항에 나왔고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이 임 특사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행사도 있었다. 그러나 28명이나 되는 탈북자들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국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탈북자들은 ‘도착증명사진’ 촬영을 위해 사진기자들 앞에 잠깐 멈췄다가 곧바로 관계기관이 마련한 버스를 타고 공항을 떠났다.
눈 오는 날의 이 에피소드는 현재 남북관계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헐벗고 굶주리며 탄압당하는 북한 주민은 애써 외면하면서 권력의 단물을 누리고 있는 북한 지배층에 매달리는 게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다. 언젠가는 물러나게 될 북한 권력층을 의식하느라 2300만명이나 되는 북한주민의 고통은 남북대화 테이블에 단 한번도 제대로 오르지 못했다.
작년에만 1141명의 탈북자가 입국했다. 94년 이후 매년 입국자가 배로 급증하는 추세인 데다가 최근에는 선박을 이용한 탈출시도까지 등장해 앞으로 그 수가 얼마가 될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주민들의 탈북은 북한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위기와 비교하면 빙산의 작은 귀퉁이에 불과하다. 올겨울에도 외부세계의 지원이 없으면 수백만명이 굶어 죽을 것이라는 경고가 끊이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자유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정부가 북한 권력층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북한 주민의 참상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책임회피다.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한 침묵은 동족으로서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기형적인 남북관계를 바로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제기됐다. 지난주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 그것이다. 노 당선자는 “북한의 인권탄압과 북한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 정부가 지켜온 금기(禁忌)를 깬 것이다.
독재권력의 인권탄압을 내부의 힘으로 고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70, 80년대 미국과 유럽 선진국이 우리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기울인 관심은 얼마나 치열했던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권탄압에 대한 응징차원에서 주한미군 철수카드를 들이대기도 했다. 국내 인권상황에 대한 외부의 간섭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땅의 인권개선을 가져온 쓴 약이었다.
이제는 북한에 대해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할 때다. 적극적으로 북한의 인권을 거론해야 한다. 노 당선자는 말의 씨를 뿌렸다. 이왕 금기를 깼으니 싹을 틔우고 결실을 맺게 하는 역할까지 하기를 바란다.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이 한반도의 남쪽에서만 적용되는 편협한 것이 아니라면.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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