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극단의 이념적 편향성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념적 중간 지대를 선점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여권 내부에선 중도 성향 의원들이 속속 세 결집에 나서 ‘친노(親盧) 386’ 그룹을 겨냥해 노선 투쟁을 벌일 태세다. 한나라당에서도 소장파와 중도 세력이 과감한 당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각에선 정치권의 ‘뉴 라이트’ 기류가 정계 개편의 불씨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중도 성향 유권자 잡기 경쟁=열린우리당에서 실용주의를 표방한 중도 보수 성향 의원 모임이 잇따라 출범한 데는 현 정권의 국정 지지도 하락이 ‘이념 과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통렬한 자기반성이 깔려 있다.
1일 출범한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회장 유재건·柳在乾 의원)’은 “당내 중도 세력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겠다”고 선언했다. 간사인 안영근(安泳根) 의원은 “(여당이 추진하는 4대 입법)의 단독 처리는 안 된다”며 강경 일변도로 흐르는 당내 기류를 정면 비판했다.
지난달 돛을 올린 일토삼목회(一土三木會)도 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했다. 행정 관료 및 지방자치단체장을 지낸 의원 4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선 소장파 의원들과 박진(朴振) 의원 등 중도 성향 의원들이 세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당 부설 여의도연구소는 당 변화의 전진기지로 내년 초 당 선진화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박세일(朴世逸) 소장은 “이념경쟁이 끝난 21세기는 정책경쟁의 시대”라며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노선도 평등보다는 성장을 강조하는 등 시장 쪽으로 다가서고 있고 보수 진영도 변화를 시도하는 등 좌우 이념이 수렴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30, 40대 민주당 총선 출마자와 각계 전문가 100여명은 11일 중도개혁주의를 내걸고 민주청년포럼을 출범시켰다. 양윤녕(梁允寧) 포럼 사무총장은 “현 정부는 급진적 좌 편향을 보이고 있고, 한나라당은 변화의 몸부림조차 보이지 못한 채 강경보수 세력에 발목이 잡혀있다”고 출범 배경을 밝혔다.
▽왜 중도로 가야 하나=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는 ‘온정적 보수주의자’ 전략을 내세워 집권했다. 민주당의 단골 메뉴였던 교육과 빈곤 문제에도 초점을 맞춰 공화당을 중도 노선으로 옮겨온 것이 승인(勝因)이었다. 지지층의 외연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엔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예산 적자 해소와 범죄율 억제 등 공화당의 단골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공화당의 허를 찔렀다.
열린우리당 정장선(鄭長善) 의원은 “그동안 정부 여당은 개혁 목표 하나만 갖고 달려 왔다”며 “중도적 목소리가 사회를 이끌어야 하며 양 극단은 소수를 대변하는 분출구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김형오(金炯旿) 사무총장은 최근 “(두 차례 대선에 패배한 것은) 서민 정당의 이미지가 없었고 ‘성장과 분배의 선(善)순환’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며 “한나라당은 진짜 바보정당”이라고 자아 비판했다.
윤여준(尹汝雋) 전 여의도연구소장도 “한국의 보수 세력이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진보 진영의 가치를 보수적 방법론으로 재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치권 ‘빅뱅’ 오나=정치권에선 당장 정계 개편이 가시화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각 당의 노선 투쟁이 확산될 경우 정치권의 ‘빅뱅’으로 이어질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우선 20% 선에서 맴도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낮은 지지도가 1차적 변수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 회복 가능성이 희박하면 여당 의원들의 동요가 커질 수밖에 없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의 지지율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 2006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의원들이 성향별로 헤쳐 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도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2006년 지방선거가 정계 개편의 고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나라당에서도 소장파와 강경 보수 진영의 노선 투쟁이 극한 상태로 치달을 경우 분당(分黨) 사태가 초래될 수도 있다. 당 안팎에서 제기되는 ‘대체정당 건설론’도 심상치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나라당의 한 중진은 “노 대통령의 정국 장악력이 급속히 떨어질수록 중도 성향의 신당이 출범하는 등 정치권이 다당제(多黨制)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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