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징계는 타당한가=이번에 징계 조치 결정이 내려진 박 의원은 지난해 10월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한국국방연구원(KIDA)의 ‘전쟁여건 변화 모의분석’ 보고서의 내용 일부를 공개했다.
박 의원 측은 이에 앞서 KIDA로부터 대면(對面) 보고를 받을 때 이 보고서가 2급비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한국군 단독 전력으론 16일 만에 수도권이 붕괴된다’는 보고서 내용을 보도자료로 배포했다.
정 의원도 지난해 통일부로부터 국가 2급비밀인 ‘충무계획’(북한의 정권 변화 시 남한의 대책에 관한 내용)에 대해 대면 보고를 받고 국정감사장에서 이를 공개했다. 정 의원이 공개한 기밀 내용은 중국과 일본 언론에 크게 소개돼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다.
국회 윤리위의 징계 조치는 찬성 11명, 반대 3명으로 결정됐다. 윤리위에 열린우리당 8명, 한나라당 5명, 민주노동당 1명이 출석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야당 의원들도 기밀 유출의 문제점을 인정한 셈이다.
두 의원은 “윤리위의 결정은 정상적인 의정 활동을 저해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박 의원은 특히 “징계 결정 과정에서 해당 의원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국회 일각에선 지난해 11, 12월 두 차례나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 회의 내용을 공개한 민주노동당 노회찬(魯會燦) 의원이 윤리위에 제소되지 않은 점을 들어 이번 결정이 형평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국회의원의 비밀 획득 범위=국민의 알 권리와 기밀보호를 둘러싼 의원들과 정부 부처 간 줄다리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의원들이 기밀 내용을 보고해 달라고 요청할 경우 각 부처는 1급비밀이 아닌 이상 이를 거부하기 어렵다. 대신 정부는 각종 규정으로 그 범위를 최대한 제한하고 있다.
국회의원에게 실시되는 기밀 보고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국회 및 당정협조업무처리 지침’(국무총리령)에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기밀 보고는 담당 국·실장 급이 서류 제출이 아닌 대면으로 직접 실시한다. 보고 전에는 해당 자료의 비밀 등급과 함께 ‘외부로 유출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지해야 한다. 의원들은 기밀에 대한 녹음과 메모 발췌 복사 등을 일절 할 수 없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한 의원 보좌관은 “대면 보고가 끝난 뒤 ‘어떻게 이 많은 걸 기억하고 이해하느냐. 일부 내용을 복사하자’고 하면 해당 부처에서도 양해해 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원들의 기밀 유출이 잇달자 정부의 태도는 점차 강경해지고 있다. 국방부는 올해부터 한미안보정책구상(SPI) 회의 등 대미 협상의 중간결과나 내용을 국회에 일절 보고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국방부는 또 최근 국회 국방위 소속의 열린우리당 임종인(林鍾仁) 의원이 “무기 체계를 공부하는 세미나에 관련 실무자를 보내 달라”고 요구해 온 데 대해서도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무기 체계는 대부분이 2, 3급 비밀이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의원들이 기밀이 공개될 경우의 파장을 너무 소홀하게 생각한다”며 “국회 윤리위를 제외하고는 기밀을 공개한 의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려운 점도 정부의 고충”이라고 말했다.
한편 육군 중장 출신인 한나라당 황진하(黃震夏) 의원은 “군의 비밀 분류를 존중하더라도 국회의원이 국익을 위해 공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도 이해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한 기밀분류 기준 필요=의원들도 기밀을 공개하기 전 국익을 생각한다고 입을 모은다. 다만 일부 기밀은 공개하는 것이 정부의 잘못된 업무 방향을 바로잡는 데 필요하다는 것.
의원들은 특히 정부가 자의적으로 기밀을 분류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국방부가 분류한 군사 기밀은 1급이 9건인 데 비해, 2급은 22만9700여 건, 3급은 36만7900여 건에 이른다.
외교안보분야 전문가들은 “미국은 1급비밀이라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비밀에서 자동 해제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 준다”며 “의원들의 기밀 유출 사태는 정부의 지나친 ‘비밀주의’가 자초한 측면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최호원 기자 bestiger@donga.com
▼미국의 경우, ‘행정착오 숨기려 기밀지정’ 제한▼
미국 의회는 행정부의 국가기밀 독점에 저항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긴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6년 ‘쿨리지 위원회’는 “명확하지 않은 국가기밀 분류 기준 때문에 과비밀분류 사례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했고, 1957년 ‘라이트 위원회’는 ‘1급비밀(top secret), 비밀(secret), 기밀(confidential)’로 된 국가기밀 분류체계에서 ‘기밀’ 항목을 아예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1997년 대니얼 모이니한 상원 의원 등 의원 12명이 참가한 ‘정부 기밀 보호 및 감축 위원회’는 투명한 절차와 기준을 규정한 법률 마련을 제안했다.
현재 미국의 국가기밀 분류는 2003년 3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발표한 국가기밀 처리 기준을 따르고 있다.
이 기준은 △법률 위반이나 행정의 비효율성 또는 행정적 착오를 감추기 위한 경우 △개인이나 조직 또는 단체를 당혹하게 하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경우 △국가안보를 위해 보호를 요하지 않는 정보의 공개를 막거나 늦추게 하기 위한 경우에는 국가기밀지정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또 ‘보호의 필요성보다 정보의 공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크다고 판단될 경우 국가기밀 분류를 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기밀로 분류된 지 25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국가기밀이 해제된다.
하지만 미국의 국가기밀 관리는 철저하다. 2003년 7월 미 의회는 ‘9·11 테러’의 진상조사 보고서를 공개했으나 ‘적에게 유리한 국가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거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우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는 내용’ 중 일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의회에 대한 정보 브리핑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는 일이 발생하자 2003년 10월 하원 의장과 민주당 지도자, 상원의 민주 공화당 지도자, 상하원의 정보위원회 위원장 등 8명에게만 브리핑을 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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