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일본은 개인보상을 하려 했는데 한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개인청구권이 사라졌다는 식의 인식은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일본정부는 피해자에 대한 보상 요구에 대해 이를 철저히 부인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즉, ‘피해자들은 일제강점기에서 일본 국민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측의 주장이었다. 개인보상에 대한 일본 측의 언급은 그것을 지불하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액수를 낮추려는 협상기술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된다.
둘째, 자금제공으로 인해 일본의 책임이 면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본은 자금지불의 명목을 청구권이 아닌 ‘경제협력’으로 끝까지 고집했다. 일본은 청구권 변제를 이행하지 않은 채 단지 경협자금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 결과로 청구권이 해결되었다는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편 것이다. 법 논리도 문제지만 도의적 인도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려울 것이다.
셋째, 한국정부의 자금사용 방식에 대한 평가 문제이다. 공개된 문서는 정부가 청구권 자금을 전체 국민의 이익과 경제개발을 극대화하는 데에 사용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개인의 청구권을 소홀히 다룬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나 최빈국의 처지에 놓여 있던 당시 현실을 감안하면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빈곤 탈출과 경제건설로 설정한 선택은 나름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
피해자 보상 문제는 원인 제공자이며 동시에 공동책임을 안고 있는 한일 양국 정부가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을 꾀하는 것이 최선의 해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한국정부가 재협상 요구를 제기하기는 곤란할 것으로 판단된다. 설사 한국정부가 재협상을 요구하더라도 일본의 역사인식 수준 및 피해자 개인배상 문제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감안한다면 일본정부가 전향적 자세로 이에 응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따라서 당분간 보상 문제는 국내 대책이 중심을 이룰 것이다.
보상대책에 관해서는 개별소송을 통한 사법적 해결을 기다리기보다 큰 틀의 정치적 해결을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보상조치는 반드시 사회적·국민적 합의에 기반하여 강구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국민 모두가 공유하는 차원에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피해자의 범위 및 피해 정도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일관된 원칙과 형평성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보상에 대한 형평성이 확보되지 못할 경우 또 다른 혼란과 분열이 초래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고통과 질병,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고령의 피해 생존자에 대해서는 긴급구제 성격의 조치가 선행되길 바란다.
식민지 피해자의 보상대책이 단순히 ‘돈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요한다. 기본적으로 피해보상은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음으로써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정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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