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한 번 입을 열자 온갖 국가기밀(?)이 줄줄이 새나왔다.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인혁당 사건…. 그의 입을 막으려던 박정희 대통령의 회유 서신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사신(私信)마저 공개된다.
박동선의 ‘코리아 게이트’가 터져 나온 것도 이때다.
그러고도 ‘배가 고팠던지’ 그는 회고록 집필에 나선다. ‘치정’(정인숙 사건)에서부터 대북공작(‘실미도’)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정권의 공(公)과 사(私)를 낱낱이 까발릴 셈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전전긍긍했다.
마침내 한국 정보기관의 ‘표적’이 되고 만 김형욱. 그는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설(說)이 구구하다. 파리에서 살해된 뒤 센 강에 버려졌다고도 하고, ‘산채로’ 짐짝처럼 포장돼 대한항공(KAL)기편으로 서울로 ‘탁송’됐다고도 한다.
더 끔찍한 얘기도 있다.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나! 잘못했다고 엎드려 비는 김형욱을 자동차에 태운 채 그대로 폐차장에 밀어넣어 버렸으니….” 차지철 경호실장이 김형욱을 박 대통령 앞에 무릎 꿇렸고, 결국은 폐차장 압착기 아래서 최후를 맞았다는 것.
그러나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관련자들은 ‘감도 있고 추측도 있지만’ 말을 아낀다. 그리고 정작 당사자들은 세상에 없다. 김형욱이 실종된 지 열아흐레 만에 10·26이 터졌고, 박 대통령과 차지철을 ‘보냈던’ 김재규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박정희의 ‘일인지하(一人之下)’에서 장장 6년3개월 동안 ‘남산’을 지켰던 김형욱. 그의 ‘주군(主君)’에 대한 충성심은 광신적(狂信的)이었다. 여하한 ‘불충(不忠)’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의 닉네임은 ‘멧돼지’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절대 권력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 말석을 지키고 있어야 했으니. 그는 모멸감과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1973년 미국 망명길에 오른 그는 반독재 민주투사를 자처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유신 때문에 한국이 망한다”고 분개했다.
숱한 ‘폭로와 비난’은 그 자신 정치적 죄업(罪業)을 씻어 보려는 노력이었을까. 글쎄?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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