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피플] 리짜이팡 대만대표부 대표

  • 입력 2005년 8월 12일 04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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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야당 의원들로부터 “당신이 한국 공무원이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친한파인 리짜이팡 주한 대만 대표부 대표. 신원건  기자
대만 야당 의원들로부터 “당신이 한국 공무원이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친한파인 리짜이팡 주한 대만 대표부 대표. 신원건 기자
《한국의 제16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던 2002년 12월 19일 오후.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의 고문 자격으로 방한 중이던 L 씨는 한나라당 J 의원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후 6시 투표 종료와 함께 발표된 출구조사 결과는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신승. J 의원은 “이회창 대세론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느냐”며 큰 실망감을 토로했지만 L 씨는 속으로 ‘천 총통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군’ 하고 되뇌었다.》

천 총통은 한국 대선에 관한 각종 비공개 여론조사 결과까지 꾸준히 챙기면서 ‘노 후보가 2, 3% 차이로 이길 것 같다. 당선 직후 곧바로 내 축하 친서가 전달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실무진에 지시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이 L 씨였다.

L 씨는 이날 오후 10시경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를 방문해 유재건(柳在乾) 선거대책위 특보단장을 통해 축하 친서를 전달했다. ‘노 대통령의 임기 중에 한국-대만 관계가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

그로부터 5개월 뒤 L 씨는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번에는 친서 내용을 실천할 현장 외교 사령탑 자격으로.

1992년 斷交… 떠나는 대만대사
한국과 대만의 외교관계가 단절된 1992년 8월 24일 밤 당시 진수지(金樹基) 주한 대만 대사 부부가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하던 모습. 진 대사는 비행기 탑승 직전 “언젠가 양국이 깊은 우정을 바탕으로 쌓아온 협력관계가 회복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리짜이팡(李在方) 주한 대만대표부 대표가 바로 그 L 씨다.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빌딩 6층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대표부 직원 51명 중 대만인(25명)보다 한국인(26명)이 더 많습니다. 제 관저의 요리사와 운전사도 한국인이고, 최근에는 한국인을 제 비서로 채용했습니다. 대만과 한국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는 것이 제 소신이자 고집입니다.”

그는 이런 ‘한국사랑’ 때문에 대만 야당 의원들로부터 종종 “당신은 대만 외교관이냐, 한국 공무원이냐”는 핀잔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만과 한국은 친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단언했다. 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이고, 지리적으로도 가깝고(비행기로 1시간 50분 거리), 쌍방 무역도 경쟁적이라기보다는 보완적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통계를 봐도 대만은 한국에 ‘고마운 존재’다. 2004년도 대만을 방문한 한국인은 약 13만 명이지만 방한한 대만 관광객은 그 2배가 넘는 30만 명. 또 매년 약 30억∼60억 달러(약 3조∼6조 원)의 무역 흑자를 한국에 안겨 주고 있다.

2004년 다시 열린 하늘길
2004년 12월 1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 임직원들이 대만 항공기 여승무원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며 ‘서울-타이베이 정기노선 복항’을 축하하는 장면. 양국 간 정기 항공편은 1992년 외교관계 단절과 함께 중단됐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대만의 눈에 비친 한국은 매정했다. 1992년 8월 24일 양국 외교관계가 단절된 뒤 한국 정부는 그 어느 나라보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충실해 왔다. 그 때문에 정부 고위급 인사가 대만을 방문하는 것조차 금지됐다. 대만과의 관계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 대표는 “한국의 처지를 존중한다. 단교 때의 섭섭함도 이제는 100% 사라졌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서로 진짜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한국은 중남미 같은 먼 곳에서도 친구를 찾습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는 늘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2시간 반이 지났지만 좀처럼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인터뷰는 저녁 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형식적인 인터뷰는 싫어합니다. 한번을 만나도 넉넉하게 만나고 싶어서 다른 일정을 다 조정했습니다. 기자 분을 만나는 것은 한국 독자들과 만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와 헤어지면서 한국을 사랑하는 그가 ‘한국의 사랑’에 정말 목말라 있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Q: 사연많은 ‘대만’의 또다른 명칭은▼

대만(臺灣·Taiwan)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과 비슷한 설움을 국제사회에서 겪어왔다. 강대국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 때문이다.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은 1912년 건국 당시 이름. 1949년 중국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쫓겨 당시 국민당 정부가 지금의 대만 섬으로 철수한 뒤 ‘대만’이란 이름도 함께 쓰이게 됐다.

냉전 시대에는 ‘자유중국’이란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대만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는 ‘중화타이베이’란 이름으로 가입돼 있다. 중국이 중화민국이나 대만이란 명칭을 쓰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대만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2개나 땄지만 국기(청천백일기) 대신 대만올림픽위원회 깃발이 올라간 것도 같은 맥락.

1993년 한국과 비공식 외교관계를 복원할 때 대만은 민간대표부의 명칭으로 ‘주한 중화민국 대표부’를 원했다. 그러나 중국을 의식한 한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주한 타이베이(臺北·대만의 수도) 대표부’로 합의됐다.

한국 언론은 독자의 혼란을 막기 위해 대부분 ‘주한 대만대표부’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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