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각국 수석대표의 기조연설에서 북한은 예상대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지난해 6월 3차 6자회담 때 내놓은 제안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대표단의 표정은 별로 어둡지 않았다. 북-미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강한 협상 의지를 보인 데서 희망의 단초를 찾는 듯했다. 협상은 서로 차이를 드러내 놓고 이를 좁혀가는 과정인 만큼 6자회담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게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국 측 수석대표인 송민순(宋旻淳)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기조연설 후 남북 접촉을 갖고 우리 제안의 취지와 배경, 북측 제안의 의미 등에 대해 상세하게 짚어가며 이야기했다”고 말해 협상이 진척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분명해진 쟁점들=한반도 비핵화가 회담의 목표라는 데는 6개국 모두 이의가 없었으나 비핵화의 의미에 대한 이들 국가의 해석은 출발부터 평행선을 달렸다.
북한은 미국의 핵위협 제거 및 남북한의 비핵지대화를 북핵 폐기와 같은 차원의 문제로 제기했다. 기조연설에서는 ‘남한의 핵무기 철폐 및 외부로부터의 반입 금지’와 ‘미국의 핵우산 제공 철폐’를 명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주한미군의 핵 의심 시설에 대한 사찰 요구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한미동맹의 문제라며 북한이 간섭할 사항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미 등 참가국들은 일관되게 ‘북핵 폐기’를 요구하고 있어 북한과의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북한이 폐기 대상으로 ‘핵무기 및 핵무기 계획’만을 명시한 것은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방증이다. 이는 ‘모든 핵 프로그램의 폐기’라는 미국의 요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평화공존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와 무조건적인 핵 불사용 담보라는 북한의 요구도 미국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안전보장의 문서화는 물론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 나아가 현행 정전협정 체제의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까지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3차 6자회담에서 밝힌 ‘6월 제안’을 북한이 단칼에 거부한 것도 걸림돌이다. 한미는 이를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른 단계적 핵 폐기 방안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북한은 ‘선(先) 핵 폐기’ 강요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이 거론한 북한 미사일 및 인권 문제도 협상이 거의 불가능한 쟁점이다. 이는 북한이 문제 삼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과 맞바꿔 의제에서 함께 제외시키기 위한 협상용이라는 분석이 많다.
▽북-미, 자극적인 표현은 서로 자제=북한과 미국은 북핵 문제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용어는 애써 피해갔다. 협상의 판을 깨지 않으려는 의지와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다’거나 이를 바탕으로 한 핵군축회담 주장을 명시적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평화적 핵 이용 권리도 에둘러 주장했을 뿐이다. 직설적인 표현을 애용해 온 북한으로서는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했다는 평이다.
핵 폐기의 조건으로 제시한 ‘평화공존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라는 표현도 평화협정이나 북-미 불가침협정에 대한 미국의 거부감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측은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을 ‘chairman(위원장)’으로 호칭한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종전의 ‘Mr.(선생)’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
북한이 강하게 반발하는 고농축우라늄(HEU) 문제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CVID)의 핵 폐기’라는 표현도 직접 쓰지는 않았다. 그 대신 미국은 ‘모든 핵 프로그램’ ‘효과적 검증을 수반한 폐기’라는 간접 표현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공동 합의문은 나올 듯=이날 기조연설의 최대공약수는 ‘공동 합의문 작성에 대한 공감대’이다. 6개국 모두 이번 회담에서 이것만큼은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후문이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에도 의견이 일치했다. 이는 북한이 핵 폐기를 약속하면 다른 나라들이 보상을 약속하고, 핵 폐기 조치를 취하면 경제지원과 안전보장 등에 나선다는 것.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는 한반도 비핵화 목표와 ‘핵 폐기 대 보상’ 원칙을 천명하고 폐기 과정 및 보상의 내용을 열거하는 수준에서 공동 합의문이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핵 폐기의 어느 단계에서 무엇을 얼마나 지원하느냐는 구체적인 문제는 다음 회담으로 넘길 듯하다.
베이징=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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