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거짓말 구설수에 이어 접대골프와 내기골프 의혹까지 속속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이 총리 유임론을 펴왔던 여권 인사들조차도 “더 버티기 힘들겠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12일에는 청와대에서도 변화의 기류가 감지됐다. 그동안 청와대는 “국민정서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따질 것은 따져봐야 한다”고 이 총리를 엄호하는 발언이 많았다.
그러나 이날 한 청와대 핵심 참모는 “파문 초기와 달리 지금은 이 총리가 워낙 지저분한 문제로 잔매를 많이 맞았다”는 발언이 나왔다. ‘지저분한 문제’란 잇따른 거짓말 해명, 앞뒤를 비우고 라운드 한 ‘황제골프’, 골프비용 대납, 내기골프 등 뒤늦게 드러난 의혹들을 지칭한 것.
이는 법규 위반과 공무원윤리강령 위반 소지가 있는 점에서 “단순히 3·1절에 골프했다는 사실만 갖고 진퇴를 말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기존의 입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열린우리당에서도 이날 정동영(鄭東泳) 의장 주재로 열린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사퇴’ 쪽으로 무게추가 옮겨진 당내 여론이 쏟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원내대표단이 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의견을 파악한 결과 이 총리 스스로 거취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응답이 70% 정도인 것으로 전해졌다.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의원은 “이번 사태가 ‘총리가 사퇴할 사안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계속 유임할 수 있겠느냐’는 데에는 대부분이 회의적”이라고 전했다.
우상호(禹相虎) 대변인은 “총리 거취 문제는 대통령이 14일 귀국하면 지역 민심과 여론을 수렴해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심과 여론은 총리 사퇴가 우세하다.
특히 정 의장은 회의를 마친 뒤 당내 의원들의 의견수렴 작업을 주도한 김한길 원내대표와 30분가량 밀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는 ‘이 총리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당내 여론을 청와대나 이 총리 측과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를 놓고 깊숙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원내대표는 “최근 여러 정황에 대해서도 당의 입장을 하나로 정리하기 위해서 많은 얘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이제 분위기는 대충 한 방향으로 모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당 지도부와 별개로 이 총리와 친한 몇몇 의원들도 이 총리에게 상황의 심각함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리 유임론을 제기했던 김근태(金槿泰) 최고위원계 의원들도 ‘이 총리 감싸기’를 중단했다. 김 최고위원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며 입장 변화를 보였다.
주말을 기해 지역구 여론을 접한 의원들은 “여론이 상상 이상으로 악화돼 있다”며 “이 총리가 스스로 물러나 이번 사태가 하루빨리 매듭지어지지 않으면 5·31 지방선거는 해보나 마나”라며 불안감을 나타냈다.
서울이 지역구인 한 의원은 이날 “오늘 지역구에서 4개 모임에 갔는데 이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100%였다”며 “골프를 쳤다는 것보다는 자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일부 친노 직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마녀사냥식 여론몰이에 밀려서는 안 된다”, “사퇴까지 할 일은 아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이들 역시 여론이 크게 악화돼 있는 것은 인정하는 상황이다. 당 일각에서는 지방선거 이후로 사퇴를 미루는 ‘시기 조절론’도 제기되고 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골프만으로는 사퇴 이유 안된다”
총리실 “의혹규명前 떠밀리듯 물러날수야…”
李총리 오늘 검찰수사관련 입장표명 할듯
이해찬 국무총리의 거취 문제와 관련한 12일 국무총리실의 기류는 대체로 ‘선 검찰수사’, ‘후 거취 논의’ 쪽이었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철도파업이 벌어진 3·1절에 불법 정치자금 제공, 주가 조작 등의 전력이 있는 기업인들과 골프를 쳤다는 사실만으로는 총리 사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골프 모임 해명 과정에서 일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것 역시 총리가 물러나야 할 중대한 이유로 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사퇴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3·1절 골프를 둘러싸고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해 검찰의 수사를 당당하게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총리가 사퇴를 포함해 ‘책임’을 확실히 지겠다는 것. 다만, 골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상 규명도 하기 전에 밀리듯이 사퇴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항변’인 셈이다.
이는 골프모임 자체와 한국교직원공제회의 영남제분 투자 문제 등 파생된 의혹들을 분리해 대응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여기에는 검찰이 수사를 해도 이 총리의 불법 사항은 나올 게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게 이 총리 측근들의 주장이다.
한 측근은 “이 총리는 그런 비리에 연루될 분이 아니다”라며 “이 총리 자신은 언론이 제기하는 각종 비리 로비 의혹에 대해 결백하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파생 의혹’ 사건에 총리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비치고 있는 현 상황은 선선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이 총리는 1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회의실에서 열리는 확대간부회의에서 사퇴 여부와 상관없이 검찰수사를 강조하는 쪽으로 또 한 차례 입장 표명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가 상황 변화에 따라 뜻밖의 ‘선택’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총리실 관계자는 “이 총리는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며 언제든지 사퇴 카드를 던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14일 귀국하는 대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것으로 보인다. 총리실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인사에 있어 여론보다는 실체적 진실이 어떤지를 더 중시해 온 그동안의 관례에 비춰볼 때 ‘검찰수사 결과 발표 후 사퇴 결정’ 카드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편 이 총리는 주말 내내 별다른 외부 일정 없이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 계속 머물렀다. 일반적인 상황보고를 받고 언론 동향도 살핀 것으로 알려졌다.
총리실 고위 간부들도 이날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후에 사무실로 나와 향후 대응과 관련한 회의를 가졌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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