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지사는 이에 앞서 3일 취임 후 첫 일정으로 군산항을 방문해 자동차 수출 화물선에 올라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군산항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 그의 업무 스타일인 현장 확인 행정과 속도 행정의 단면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그는 현재 전북의 상황을 ‘총체적 위기’로 진단하고 지역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만들기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한 전략으로 중국시장 공략과 새만금 지역을 활용한 환서해권 주도권 장악, 질 위주의 기업 유치 등을 제시했다.
―민선 4기 전북 도정의 최우선 방향은 무엇인가.
“도정의 키워드는 ‘경제’입니다. 경제 살리기가 도정의 시작이자 최종 목표죠. 우리 전북은 여전히 ‘낙후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년 2만여 명의 도민이 고향을 떠나고 있습니다. 먹고살 것이 없거나 자녀 교육에 불리하기 때문이죠. 지역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뭐든지 다할 생각입니다.”
―중국 시장 공략을 공약했는데 배경과 구체적인 전략은….
“중국 동해안과 한국, 그리고 일본 규슈를 잇는 환서해권은 세계 최대 경제권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인구 100만 명을 넘는 도시만 60개나 됩니다. 중국의 동해안 공업도시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초정밀 첨단부품 소재들입니다. 이 가운데 자동차 부품소재산업은 전북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첨단 부품소재산업을 키워 나가기 위해 제2 대덕연구단지(지역특화형 국가연구단지) 유치를 추진하겠습니다. 또 값이 싼 중국 농산물에 맞서 고품질의 농산물을 중국에 역으로 수출하는 전략을 구상 중입니다.”
―새만금 특별법 제정은 왜 필요하고, 수질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있는가.
“새만금은 전북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는 국책 사업으로 속도와 내부 수질 유지가 성패를 좌우합니다. 방조제는 이어졌지만 서남해안권 개발을 놓고 지역 간 경쟁이 치열해 타이밍을 놓치면 샌드위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많은 부처가 협의하고 이견을 조정하려면 시간이 너무 걸려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내부 개발을 저해하는 요인들을 차단하고 개발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새만금 특별법이 반드시 제정돼야 합니다. 내부 수질 문제도 막연히 ‘문제없다’라고만 할 게 아니라 지역개발과의 상충문제, 새만금 유역의 하수관거 대폭 설치 등 난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자유무역협정(FTA)과 쌀 시장 개방으로 농촌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농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장기적으로 돈 버는 농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생산과 제조, 수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집적화한 식품산업단지를 조성하겠습니다. 이 단지는 도내 농가에서 생산된 고품질 친환경농산물을 고급식품으로 가공해 신웰빙층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중산층에 내다 파는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첨단농기계를 생산하는 산업단지로 농기계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쌀 소득 직불제 현실화와 밭농업 직불제, 농가경영회생 제도 등을 도입하겠습니다.”
―행정 기구 개편이나 조직 혁신 방안은 무엇인가.
“일부 공무원들이 아직도 권위주의와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비전을 갖지 못한 상태입니다. 도의 기구는 행정 지원 기능을 축소하고 사업집행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달 안에 개편하겠습니다. 일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공무원의 경쟁력을 높여 조직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겠습니다.”
―여당 유일의 광역 단체장인데….
“야당의 반발이나 견제도 있겠지만 지역 발전을 위해 여당 프리미엄을 활용할 것입니다. 142석의 국회 의석을 지닌 여당과 당정 공조를 강화해 나가겠지만 전북 발전에 여야를 따지지 않겠습니다. 전북 경제를 살리는 문제에 관한 한 도민 모두는 ‘전북도민당’ 소속일 뿐입니다.”
―도 출연기관이나 산하 단체 등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여론인데….
“출연기관이나 산하 단체 등에 대한 혁신 여론이 있는 만큼 전반적으로 경영진단을 해 볼 계획입니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 달동네서 어린 시절… 주거개선 사업 ‘애정’▼
김완주 전북도지사는 공무원들 사이에서 ‘워커홀릭(일 중독증)’으로 불린다.
그는 ‘일이 취미’라고 할 만큼 끊임없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내고 업무 추진 과정에서도 타이밍과 효율을 강조하며 만족할 만한 해법이 나올 때까지 직원들을 다그친다.
그는 올해 초 도지사 출마를 위해 전주시장 직을 떠나면서 “역대 시장 가운데 직원들에게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시장으로 기억될 것 같다”며 미안함을 표시했다.
곱상하고 깔끔한 외모의 그에게서 어린 시절 가난의 그림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시대 대다수 엘리트들의 성공 스토리처럼 그도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과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봉제공장에 다니던 누이마저 폐병으로 숨지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전주고 재학 시절 학비를 내지 못해 쫓겨난 적도 있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닐 때는 가정교사와 학원 강사로 학비는 물론 집안 생활비까지 대야 했다. 달동네 출신인 그는 민선 전주시장 때 달동네 주거 환경 개선 사업에 4000억 원을 쏟아 부었다.
1973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전북 고창군수와 남원시장을 거쳐 내무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등 엘리트 행정 관료의 길을 걸었다.
전북도 기획관리실장이던 1998년 당시 유종근 도지사의 반대를 무릅쓰는 강단을 보이며 전주시장에 도전해 두 차례 당선됐다.
5·31지방선거에서 소속 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4선 의원 출신의 민주당 정균환 후보를 꺾고 전국 유일의 여당 광역 단체장으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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