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드영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보가 쓴 ‘군인: 콜린 파월의 일생’(사진)은 1기 부시 행정부(2001∼2005년)가 편 한반도 정책의 ‘커튼 뒤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음은 주요 내용, 괄호 안 내용은 상황 설명이다.
▽백악관의 강경 자세=(2차 북한 핵 위기가 터진 지 4개월 뒤인) 2003년 2월 당시 상원 외교위에서 의원들이 부시 행정부의 선제공격론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자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미국이 언젠가는 북한과 직접 대화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북한의 첫 접촉은 그해 4월 북-중-미 3국이 참가하는 3자회담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며칠 뒤 부시 대통령은 상원의원들에게 “그런 얘기는 나의 정책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백악관 참모들은 파월 당시 국무장관이 ‘배반의 비둘기’처럼 행동한다고 여겼다.
▽럼즈펠드 메모=2003년 4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북-중-미 3자 회담. 파월 장관은 중국에 “절대로 북-미 간 양자 회담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내부 메모를 통해 “미국의 목표는 북한 정권의 붕괴이지, 김정일 정권과의 대화가 아니다”며 반발했다.
럼즈펠드 장관은 이어 수석대표를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에서 존 볼턴 당시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파월 장관도 켈리 차관보에게 “회담 중 구석에서 북한 대표와 한두 시간 얘기를 나누는 것은 좋지만 절대로 테이블에 마주 앉지 말라”고 지시했다.
▽부통령이 좌지우지=2004년 2월 2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이른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CVID)’ 핵 폐기를 북한에 주문했다. 그러나 북한은 오히려 같은 원칙이 ‘미국의 북한 적대시 정책’ 포기에도 적용돼야 한다며 맞섰다. 회담은 겉돌았다.
파월 장관은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뒤 “(협상이 깨지지 않도록) 외교적 표현을 써서 대응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저녁 파티에 참석했다.
그러나 밤사이 딕 체니 부통령은 미국의 방침을 ‘강경한 어조’로 바꿔놓았다.
지침변경 사실에 분노한 파월 장관이 이튿날 백악관을 찾아가 부시 대통령에게 대놓고 “어젯밤에 바쁘셨나요”라고 물었다. 대통령은 “그들(체니 부통령 그룹)이 말 안 하던가”라고 되물었다. 파월 장관은 대통령에게 “체니의 지침대로 실행됐으면 6자회담은 끝장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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