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북한에 철갑 입혀준 두 정권 8년

  • 입력 2006년 10월 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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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무장간첩 26명이 강릉 쪽으로 침투한 북한 잠수함사건이 터졌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북의 사과가 없는 한 북핵 문제 논의를 위한 4자회담이나 대북 경제원조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반면에 미국은 1차 북핵 위기를 타결한 2년 전(1994년)의 북-미 제네바합의로 추진되고 있는 핵 동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한 달 뒤인 1996년 10월 ‘한국군은 북한이 추가 도발하면 보복 공격을 하기 위해 북의 주요 미사일 시설 12곳을 목표로 설정해 놓았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한미 간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미국은 전쟁 발발 가능성을 거론하며 한국 정부에 강한 우려를 표시했다. 아울러 전시작전통제권의 한미 공동 행사를 근거로 미국과의 사전 협의 없이 대북 보복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하기도 했다.

북한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태도가 지금과는 180도 달랐던 10년 전의 모습이다. 강경했던 한국이 유화적으로 돌아선 것은 1998년 2월 김대중(DJ) 정권 출범 이후이고 반대로 온건했던 미국이 강경으로 선회한 것은 2001년 조지 W 부시 정권의 출범과 그해 9월의 9·11테러가 계기가 됐다.

DJ 정권은 북한이 스스로 폐쇄의 옷을 벗고 개방의 세계로 나오게 하려면 햇볕을 쪼여야 한다며 대북 퍼주기와 각종 지원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되고, 각종 남북 대화와 첫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등 겉으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에 고무된 DJ는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2003년 2월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DJ의 햇볕정책을 답습했다. 개성공단 사업이 추가되는 등 DJ 정권부터 현재의 노 정권까지 8년 7개월 동안 경수로 건설비용을 빼고도 4조5800억 원어치의 대북 지원이 제공됐다. 김영삼 정권 때 3년간(1995∼97년) 지원된 2314억 원의 20배나 되는 액수다.

그러나 한미 간의 입장 변화와 남한 정부의 무차별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속은 더욱 단단해졌다. DJ 정권 출범 첫해인 1998년에만 세 차례 잠수정 및 무장간첩 침투사건을 저질렀다. 1999년 6월엔 연평해전, 2002년 6월엔 서해교전 같은 군사 도발도 서슴지 않았다.

핵과 미사일 개발에도 더욱 박차를 가해 1998년 8월엔 대포동1호를, 올해 7월엔 대포동2호를 포함한 7발의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2002년 10월엔 핵 폐기 약속을 어기고 핵 개발을 시인해 2차 핵 위기를 야기했다. 급기야 2005년 2월 핵 보유 선언에 이어 지난주 “핵실험을 하겠다”고 선언해 세상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햇볕정책이 북한으로 하여금 폐쇄의 옷을 벗게 하기는커녕 지원의 단물을 빨아먹으면서 오히려 미사일과 핵으로 옷 위에 철갑을 두르도록 한 셈이다. 이뿐인가. 조금만 심보가 틀리면 회담을 깽판 놓는 등 투정을 일삼는다. 남쪽의 지원을 고마워하기는커녕 선군(先軍) 정치에 대한 대가로, 마치 조공(朝貢)을 받는 양 거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이런 북의 이중성을 간파하지 못한 무지(無知)를 반성하고 한미 간의 관점 차이는 결국 북한만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북핵 문제 해법의 출발선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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