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북핵 해법, ‘How’보다 ‘Who’에 있다

  • 입력 2006년 10월 26일 03시 00분


마침내 북한 정권에 실망한 국민이 꽤 있을 것이다. 대북(對北) 압박정책을 주도하는 외세(外勢)와 싸우기 위한 엄포인 줄로만 알았는데 북한이 정말로 핵실험을 하다니.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이들의 입에서 “북한의 핵실험은 6·25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뒤늦은 자각이지만 이런 부류의 인사들이 진작부터 북한 정권의 실체를 꿰뚫고 있던, 깨어 있는 국민 대열에 합류하는 걸 환영한다.

뒤늦은 각성도 환영한다

드디어 노무현 정권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민도 많을 것이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해도, 핵 보유 선언을 해도, 핵실험을 해도 “아직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 “미국을 대화로 끌어내기 위한 압박전술일 뿐이다”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며 줄기차게 상황을 호도해 온 정부를 믿었던 순진함을 탓하며 땅을 치는 국민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지각 각성 또한 환영한다. 이제부터는 이들의 눈에도 핵실험을 한 북한을 향해 속 시원하게 분노를 터뜨리지 못하는 정부와 위기라고 하면서도 현실 진단과 대책 마련을 놓고 갈팡질팡하는 권력자들의 한심한 모습이 훤히 보일 테니까.

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으로 남한 사회에 몰아닥친 지각 변동이다. 이로써 북핵 문제의 실체는 대낮의 태양처럼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왜 핵폭발의 후유증이라도 되는 듯 혼란이 계속되고 정부는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가.

‘어떻게(How)’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북핵 해결을 위한 약속과 합의는 이미 넘칠 정도로 많다. 북한은 지난해 9월 19일 6자회담 공동성명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에 NPT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고 밝혔다. 북한은 1992년 초에 발효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도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이것들을 뛰어넘는 ‘How’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더 좋은 ‘How’를 찾는 것은 시간과 정력의 낭비일 뿐이다.

오늘의 북핵 위기는 합의와 약속의 부재가 아니라 그런 것들의 주인인 ‘누가(Who)’ 때문에 초래됐다. 해결 또한 ‘How’가 아니라 ‘Who’에서 찾아야 한다.

목표는 북한 ‘Who’의 변화다. 김 위원장이 핵무기를 생존 수단으로 생각하는 한 핵 위기는 끝날 수 없다. 그의 생각이 변하거나 핵무장을 포기할 정권이 들어서야 희망이 생긴다. 정부는 북한을 변하게 할 지렛대가 없다고 변명하기 전에 그동안 북에 퍼부은 현금 다발로 무슨 결과를 초래했는지 겸허한 반성부터 해야 한다.

‘북 정권 도우미’ 이제 그만

북한의 핵개발에 ‘도우미 역할’을 한 남한의 ‘Who’도 변해야 한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윤광웅 국방부 장관의 사의 표명으로 외교안보라인이 개편된다지만 ‘그 나물에 그 밥’식 인사라면 핵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 정권 대북정책 실세들의 뇌리에는 북한에 대한 특별한 선입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북한이 어떤 짓을 하든 온정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미온적으로 대응한 탓에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위기로 키웠다. 그런 큰 잘못을 흔쾌히 인정하지 않고 현재의 혼란을 ‘정치 공세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현실을 바르게 볼 사람이 필요하다. 소아병적 ‘코드 인사’ 대신 국익 우선의 대국적 ‘북핵 해법 인사’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미국의 ‘Who’에게도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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