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산업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공장의 수도권 입지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가 저물어가던 지난해 한 국책 연구기관의 연구원은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썼다가 ‘상부’의 강한 추궁을 받았다. 이 보고서를 쓰게 된 경위서까지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지방분권’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기업 규제개혁은 ‘노동 자본 같은 생산요소를 투입하지 않고서도 단시간 안에 경제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대표적 수단’으로 꼽힌다. 하지만 정권 실세(實勢)들 사이에 반(反)기업 정서가 적지 않았던 노무현 정부 5년간 규제개혁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했다.》
“개혁 추진방향은 OK, 속도는 불만” 목소리 높아
규제개혁은 비용대비 효과가 가장 큰 성장 동력
‘기업 친화적 정부’ ‘과감한 규제개혁’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 출범을 경제계가 크게 환영한 것은 이 때문이다. 현 정부 출범 8개월째 현 정부의 규제개혁 성적표는 어떨까. ‘추진 방향은 OK, 더딘 속도는 불만’이란 목소리가 많다.
특히 최근 글로벌 금융 및 실물위기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정부와 정치권은 ‘별도의 추가 비용 없이 효과는 큰’ 규제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 정부와 정치권의 적극적 자세가 필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올해 3월 355개 회원기업을 대상으로 ‘현 정부의 규제개혁에 대한 기대감’을 조사한 결과 ‘매우 높음’이 21.8%, ‘높음’이 57.8%에 달했다. 주요 기업 10곳 중 8곳 정도인 79.6%가 이명박 정부의 규제개혁에 큰 기대감을 나타낸 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노무현 정부의 규제개혁에 성과가 없었다’는 응답은 47.3%였다. 4년 전인 2004년 조사 때는 부정적 응답이 16.4%에 불과했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부진한 규제개혁에 기업의 실망감이 점점 커져갔음을 알 수 있다.
현 정부의 대통령자문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는 최근 “정부 출범 뒤 6개월간 산업단지 규제 개선, 창업절차 개선, 외국인투자 촉진 등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급한 개혁과제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제단체의 한 임원은 “규제개혁을 경제성장의 핵심 견인차로 삼은 현 정부의 국정 방향은 옳다. 다만 광우병 파동 등을 겪으면서 그 추진속도가 다소 주춤하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규제개혁의 속도 둔화에는 정치권의 책임도 크다. 여야 정쟁(政爭) 속에서 경제5단체가 기업경쟁력 강화와 투자 활성화를 위해 ‘조기 입법’을 요구한 11개 개혁 법안 처리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다.
11개 법안에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창업 기업에 대한 취득·등록세 중과 완화, 농림지역 내 공장 증설 허용, 회사 설립 절차 간소화 방안 등 기업의 간절한 규제개혁 현안이 포함돼 있다.
○ 수도권 규제 문제 합리적 해법 찾아라
이 대통령은 7월 지역발전정책 추진전략 보고회의에서 “수도권 규제가 지나치게 완화될 것이라는 것은 기우(杞憂)”라고 말했다. 당시 최상철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장도 “지방의 의사에 반해 수도권 규제를 합리화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에 대해 “대기업 위주의, 수도권 규제 완화 위주의 정책을 강조하는 것으로 비치던 현 정부가 광우병 파동과 경기침체 등을 겪으면서 지방의 경제적 소외의식을 먼저 챙기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최근 경제계에서는 일본의 수도권 규제개혁 성공 사례를 참고해 이런 ‘소모적 논란’을 ‘생산적 논의’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본도 1980년대까지는 한국 못지않은 강력한 수도권 규제 정책을 펴왔으나 1990년대 들어 국가 간 글로벌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수도권의 새로운 역할론이 부상했다.
일본 정부는 2002년에 ‘기성 시가지의 수도권 공업 등 제한법’, 2006년에 ‘공장 재배치 촉진법’ 등 대표적 수도권 규제법을 차례로 폐지해 수도권 내 대규모 투자를 이끌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수도권의 발전이 일본 전역의 투자 경기 회복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도 정착시켰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수도권과 지방 모두 ‘마이너스(―)’였으나 수도권 규제개혁 이후인 2005년 수도권은 23.4%, 전국 평균은 8.8%의 높은 ‘플러스(+) 증가율’을 보였다.
이주선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본부장은 “한국도 ‘수도권은 지방의 시장(市場)’이란 생각이 자리 잡히도록 규제개혁의 방향을 잡아나가야 한다”며 “한국 경제의 허브(중심)인 수도권이 살면 지방도 발전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본부장은 “중앙정부의 각종 규제 권한을 지방으로 과감히 이전해 지방자치단체끼리 ‘싼 세금’ ‘빠른 인·허가’ 같은 나름의 인센티브를 개발해 ‘투자 유치 경쟁’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규제개혁 없이 일자리도, 투자도 없다
“‘성장이 우선이냐, 분배가 우선이냐’의 논란은 국민에게 한국 경제가 선진국 경제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한 보고서에서 “경제가 계속 성장해야 일자리가 창출되고 저소득층의 생활도 개선된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규제개혁이야말로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큰 경제성장 동력’이다. 한국은행도 최근 “현 정부 5년간 각종 규제를 연평균 6%씩만 완화해도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현재보다 1%포인트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노동시장 규제개혁이 절실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최근 한 조사에서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제고될 경우 채용을 5% 이상 늘리겠다는 기업이 88.6%였고, 20% 이상 늘리겠다는 기업이 11.4%나 됐다”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가 이른바 ‘양극화 해소’와 취약계층 보호 등 안정성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신설 또는 강화한 규제인 △비정규직 관련 법규 △연령차별 금지 △최저임금제도 확대 적용 등이 기업의 고용 및 투자 의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인실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요즘 같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늘리면서 국내외 시장에서 잘 뛸 수 있게 하려면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각종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금융 개혁은 규제완화로 위기 방지는 감독강화로”▼
금융당국, 규제강화론 반박
“예정된 정책 차질없이 진행”
월가의 투자은행(IB)에서 시작된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글로벌 경제에 충격파를 던지면서 세계적으로 금융규제에 대한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미국 금융당국의 자율규제 방식이 IB 등의 무리한 파생상품 투자를 키웠고, 결과적으로 파국을 불러온 만큼 금융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게 논란의 요점이다.
한국에서도 금융업종 사이의 벽을 허물고, 파생상품 거래를 활성화하는 내용이 담긴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의 내년 2월 시행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이 논란과 관련해 금융전문가들은 한국과 선진국의 금융규제 수준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영국 런던시티공사가 최근 발표한 하반기(7∼12월)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서 서울은 59개 조사대상 도시 중 48위였다.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금융 인력 등의 수준을 종합해 평가한 결과다. 영국 런던, 미국 뉴욕, 싱가포르, 홍콩이 1∼4위를 차지했고 일본 도쿄는 7위, 프랑스 파리 20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23위, 중국 상하이 34위 등이었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은 중국 베이징(47위)과 인도 뭄바이(49위) 정도였다.
금융규제가 상대적으로 적은 뉴욕, 런던과는 반대로 한국은 과도한 규제 등이 금융산업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구체적인 금융회사의 행동에 대한 사후감독은 당연히 강화해야 하지만 업무 영역과 관련한 규제는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예정된 규제 완화를 차질 없이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지난달 말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최근 금융위기로 규제 강화를 요구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혁신적 상품과 서비스들은 규제 완화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며 “규제는 완화하면서 금융회사의 건전성과 금융시스템 위험에 대한 감독은 강화한다는 게 금융위의 정책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규제 완화 논란과 관련해 현 정부의 금산(금융-산업자본)분리 완화 정책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금융위는 10일로 예정됐던 금산분리 완화 관련 제도개선안 발표를 다음 주로 연기했다. 사모펀드(PEF)와 연기금의 은행 소유 규제를 완화하고,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 한도를 늘리는 데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국회 정무위원회 이한구(한나라당) 의원은 “대주주에 대한 대출규제 등 건전성과 안전성을 철저히 감독하되 국내외 자본을 차별해선 안 된다”면서 “가능하면 정부 원안대로 통과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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