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국회가 처리 여부를 결정해야 할 중요한 국정 어젠다의 하나는 개헌이다. 지난해 초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헌 문제를 제기했을 때 여야는 이를 18대 국회에서 추진키로 합의했었다. 지금은 나라 안팎의 복잡한 정치 경제 상황 때문에 잠복해 있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내년 이후엔 개헌을 공론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의 위기로 확산될 우려가 크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 등 외교안보 정세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개헌을 잘못 공론화할 경우 엄청난 정치, 사회적 갈등과 소모적인 정쟁을 촉발해 국력을 허비케 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정치권이 17대 국회 시절 18대 국회에서의 개헌에 합의한 이후 급변한 국내외 상황을 고려해 개헌 문제에 대해선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18대 국회 문열자마자 “낡은 헌법 고치자” 개헌론 봇물
권력을 위해 국민의 뜻 도외시한 과거 되풀이해선 안돼
소모적 정쟁 지양… 21세기 시대정신 담은 헌법 지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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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필요에 따른 개헌
18대 국회에서 개헌 논의를 이끌고 있는 ‘국회미래한국헌법연구회’는 늦어도 내년 초 단일안을 낸다는 계획이다. 김형오 국회의장도 김종인 전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연구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김 의장은 7월 취임 일성으로 “18대 국회 전반기 2년 안에 개헌을 완료해야 한다. 하반기로 넘어가면 어렵다”며 조기개헌론을 꺼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7월 기자간담회에서 “개헌 문제는 작년 대선 때 여야 간에 거의 공감대가 이뤄진 문제”라며 “빨리 시작할수록 좋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해 대통령 4년 중임제를 뼈대로 노 전 대통령이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한 이후 정치권에서 이뤄져 온 개헌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개헌 당위론의 핵심은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가 정책의 연속성과 정치적 책임성 면에서 문제가 있고,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또 여야가 대선 때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과 학계에선 ‘대통령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 권력구조를 중심으로 개헌 논의가 진행돼 왔다.
역대 개헌 역사를 보면 1987년만 제외하면 국민을 위해 ‘좋은’ 헌법을 만들기보다는 정치집단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았다. 국민의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전속결로 개헌이 이뤄진 것도 그 때문이다.
연세대 김기정(정치외교학) 교수는 “역대 개헌은 주로 권력구조 개편에 집중돼 변화하는 시대상과 국민의 염원을 제대로 담지 못한 측면이 있다”면서 “이번 논의도 정치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권력구조 개편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 개헌론의 쟁점과 한계
개헌의 당위에 관해선 여러 주장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개헌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직 국민적 합의가 없는 상태다.
건국대 황도수(법학) 교수는 “5년 단임제는 장기집권 방지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단점이 드러났다”며 “현재 논의는 ‘대통령의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단 개헌이 공론화되면 권력구조만 고치는 ‘원 포인트’ 개헌으로 끝나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다. 현실적으로 헌법 전문(前文)과 영토, 기본권, 경제 관련 조항 등 다양한 조항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서울대 성낙인(법학) 교수는 “1987년 만들어진 헌법은 민주화운동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라며 “다음 개헌에선 21세기에 적응할 수 있는 헌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것인지, 대한민국의 영토를 어디까지로 한정할 것인지 등의 사안에서는 보수와 좌파 진영 간에 생각이 워낙 달라 이념적 갈등이 폭발할 개연성이 크다. 정치권이 권력구조엔 비교적 쉽게 합의할 수 있지만 다른 사안들에 대해선 이견을 좁히기가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권력구조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4년 중임제’와 ‘의원내각제’에 대해서도 정계와 학계의 각론만 난무할 뿐 제도의 장단점과 국가의 미래에 미칠 파장 등에 대한 국민적인 이해는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고려대 장영수(법학) 교수는 “정치권의 합의와 국민적 합의가 동시에 갖춰져야 개헌이 가능하다”면서 “찬성과 반대가 격렬해지고 오래 지속될 경우 자칫 파국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 개헌의 실현 가능성과 전제 조건
개헌을 가로막는 정치권의 현실적 제약도 만만치 않다. 법적으론 대통령이 개헌을 발의할 수 있으나 단임 대통령에게 개헌은 정치적 모험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헌의 형식적 주체는 국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등 보수 세력이 합심하면 개헌 정족수인 재적의원의 3분의 2(200석)를 확보할 수 있지만 ‘차기’를 꿈꾸는 대선 주자들의 서로 다른 생각과 나라 안팎의 복잡한 상황을 고려할 때 국회에 이어 국민투표에서 투표자의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될 개헌안을 도출하기란 쉽지 않다. 야당 주도의 개헌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개헌에 대한 신중론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리고 국민에게 안정감을 줘야 할 때”라며 “지금은 개헌 논의 시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도 “민생은 어렵고 서민들은 죽겠다고 하는데 개헌 논의부터 하면 뭐라 하겠느냐”고 말했다. 정치권의 심사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 정치환경 변화따라 9차례 속전속결 개헌 ▼
제헌헌법… 사사오입 개헌… 3선개헌… 유신헌법…
1948년 7월 17일 건국헌법이 제정·공포된 이후 9차례에 걸쳐 헌법개정이 단행됐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지만 미군정을 거치느라 제헌헌법의 공포는 1948년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그 후 개헌은 집권 세력의 필요나 4·19혁명, 5·16군사정변, 6·10민주화운동 등 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심도 있는 논의 없이 짧은 시간에 이뤄진 경우가 적지 않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198명은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해 총 103조의 헌법을 완성했다. 당시 유진오 박사가 마련한 초안은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뼈대로 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결국 대통령제(임기 4년, 1회 중임 가능)를 채택한 제헌헌법이 완성됐다.
1차 개헌은 이 전 대통령의 재집권을 위해 이뤄진 1952년의 이른바 ‘발췌 개헌’이다. 이 전 대통령은 야당이 우세한 상황에서 국회의 간접선거로 재선이 어려워지자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는 개헌을 단행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한 자유당은 2차 개헌인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대통령 중임 제한을 없애고 이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 틀을 마련했다.
3차 개헌은 4·19혁명 이후 의원내각제 개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해서는 사전 허가나 검열제를 금지하는 등 기본권을 강화했다.
이후 3·15 부정선거의 주모자들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군중을 살상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소급 입법을 허용하는 반민주행위자 처벌에 관한 부칙(附則)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는 등 제2공화국에서 두 차례 개헌이 있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2년 대통령중심제로, 국회는 단원제로 환원하는 제5차 개헌을 단행했다. 최초의 국민투표를 통한 개헌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어 1969년 10월 대통령의 연임 횟수를 3회로 연장하는 ‘3선 개헌’을 강행했고 3년 뒤 7차 개헌으로 대통령의 1인 장기집권 체제의 법적 근거를 확립한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10·26사태와 12·12쿠데타를 거쳐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10월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면서 임기 7년의 대통령단임제를 도입한 제8차 개헌을 했다.
당시 헌법은 행복추구권을 신설하고 기본적 인권의 불가침성을 강조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을 강화한 반면 대통령에게 비상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부여해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 선택권을 봉쇄했다.
제9차 개정은 1987년 6·10민주화운동의 산물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대통령직선제를 강력히 요구했고 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에 의해 같은 해 10월 국민투표를 거쳐 제6공화국 헌법이 탄생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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