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1961년 80달러였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그가 시해된 1979년에 1636달러로 수직 상승했다. 박 전 대통령이 집권한 18년 동안 한국 경제는 연평균 9.4%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 냈다.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말 취임식에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위대한 도전에 나서고자 한다”고 밝혔다. 아버지가 투자 확대를 통해 한국 경제의 ‘양적성장’을 이뤄 냈듯 창조경제를 통한 ‘질적 성장’으로 제2의 경제 도약을 이끌겠다는 출사표를 낸 것이다. 》
실제로 대선 이후 박 대통령이 보여 준 ‘경제 리더십’은 아버지와 닮은 부분이 적지 않다.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는 “박 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진과 장관 인사를 보면 경제, 과학 분야 엘리트들을 중시하고 청와대 기능을 축소한 점에서 아버지와 빼닮았다”고 말했다.
○ 아버지 때와는 달라진 경제 환경
문제는 최근 한국의 경제 환경이 박 전 대통령 시대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 때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강봉균 전 의원은 “자본주의가 막 성장하던 개발시대에는 경제성장을 하는 길에 ‘정답’이 있었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는 현재의 대내외 경제 환경은 당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복잡하다”며 “예전처럼 ‘나를 믿고 따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 때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윤증현 전 장관도 “아버지 때는 권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식의 리더십이 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민간 부문이 성장하지 못해 정부가 미시, 거시 정책을 주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한쪽의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가 터지는 복잡한 경제구조”라면서 “경제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상황인데 대통령 후보 시절 발언이나 취임사를 보면 그런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우려된다”고 말했다.
창조경제나 중소기업 살리기 등 박 대통령이 내세운 경제 공약들에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좌승희 서울대 겸임교수(경제학)는 “창조경제나 중소기업을 살려서 일자리 만들기는 모두 좋은 정책 목표”라면서 “하지만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좌 교수는 “지금까지 해 온 것과 다르게 하지 않고서는 경제가 계속 어려울 것”이라면서 “냉철한 현실 인식과 실사구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역대 정부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야
김영삼 전 대통령(YS)에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 사람은 홍재형 전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홍 전 의원은 YS 정부 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기는 했지만 당시는 신한국당을 탈당해 국민신당에 합류한 원외(院外) 인사였다. 나라 곳간이 거덜 나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해 있다는 중대한 보고를 경제부총리나 경제수석이 아닌 야당 원외 인사한테서 듣고서야 대통령이 사태 파악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의 펀더멘털은 문제가 없다”는 참모들의 말만 믿고 있던 YS는 홍 전 의원의 말을 들은 뒤 사태 파악에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홍 전 의원은 “당시 경제팀의 상황 파악이 늦었고 상황 파악을 한 뒤에도 보고를 머뭇거렸다”며 “YS 같은 실패를 피하려면 대통령이 장관들한테 힘을 실어 주고 참모들의 말을 격의 없이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정권에서 경제부처 장관이나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인사들은 역대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경제성장률 등 가시적 성과에만 집착해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이명박 정부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서비스선진화 등의 정책을 내놓고도 결실을 보지 못한 노무현 정부의 전철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청와대나 행정부에) 거시경제 전문가가 없다 보니 정확한 처방을 하지 못하고 미시적인 정책만 하다 실패한 사례”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보수도 진보도 설득하지 못해 정책이 제한된 데 따른 것”이라며 “정치권은 물론 기업 등 다양한 경제 주체들과 긴밀히 협의해 정책 동력을 높이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소통하고 유연해져야”
박 대통령이 이전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 국회와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윤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는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국가 신용등급 상승 등 성과가 많았지만 잘못한 게 많은 것처럼 비친다”며 “정책 집행 과정에서 국민을 이해시키지 못하고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 외적인 문제가 경제적인 성과를 압도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소통을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강 전 의원도 “박 대통령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경제민주화나 복지 공약은 모두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면서 “여의도와 거리를 뒀던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 대통령이 성공적인 경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최종찬 전 건설교통부 장관은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지키기보다는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의 의견을 모아 경제정책의 큰 비전과 방향을 정한 뒤 버릴 것은 버리는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진영·문병기 기자 buddy@donga.com ▼ 美-日-中 지도자 리더십은 ▼
최근 일본 미국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경기 침체에서 탈출하기 위해 적극적인 ‘경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변 국가들과 갈등이 빚어지는 사례도 있지만, 외교력을 발휘해 부작용의 확산을 막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비판을 과감히 감수하면서까지 자국경제 살리기에 ‘다걸기(올인)’하고 있다.
가장 발 빠르게 자신의 경제구상을 현실화시키고 있는 정치지도자는 지난해 12월 자민당의 정권재탈환을 이끈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총선 전 ‘무제한 양적완화를 통한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탈출’을 주장했던 아베 총리는 취임 직후 과감한 정책들을 쏟아내며 ‘아베노믹스(아베 총리의 경제정책)’를 밀어붙이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일본은행의 무기한 국채매입과 대규모 양적완화 등 금융정책. 아베 총리는 임기가 남아있던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일본은행 총재 대신 엔화 약세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를 새 일본은행 총재로 내정했다. 아베 총리는 또 일본의 대대적 양적완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만이 고조되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경기부양책에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
이와 함께 올 1월 11일에는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돼 공공투자 확대를 뼈대로 하는 10조3000억 엔(약 117조 원) 규모의 대형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2006∼2007년 첫 총리 재직 당시 메릴린치 등 글로벌 투자은행(IB), 외신들로부터 “경제개혁에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경기대 교수)은 “아베 총리가 첫 총리 재임 이후 성공적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감한 경제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한 것 같다”며 “주변 우려에 개의치 않고 주도적으로 국면을 이끄는 ‘대세주도형 리더십’을 실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집권 2기를 맞은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오바마 대통령은 새 재무부 장관에 측근인 제이컵 루 전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명하고 일자리 확대, 신성장동력 발굴, 수출확대 등 경제성장 동력 회복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재선 이전 대외정책에 다소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환태평양 전략적경제동반자협정(TPPA)과 미-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 공세적 통상정책 등을 통해 과거보다 확장된 경제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 그는 또 지난해 재정절벽 협상에 이어 ‘시퀘스터(연방 예산 자동감축)’ 협상이 공화당과의 정면 대결로 치닫자 공화당 의원들과 수차례 직접 만나 설득에 나서는 ‘소통의 리더십’도 강화하고 있다.
18일 국가주석에 취임하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경제 분야에서 ‘개혁적 리더십’을 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중국은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열고 향후 10년간 경제운용의 밑그림으로 내수확대를 통한 질적 성장과 경제체질 개선을 내세웠다. 시 총서기와 함께 중국 경제를 이끌 리커창(李克强) 총리 내정자, 왕양(汪洋) 부총리 내정자도 개혁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다.
한재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책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중국의 특성상 곧바로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중국의 새 지도부가 점차 경제개혁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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