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행기는 지금 인천공항으로 회항합니다. 기체 떨림이 있어 원인 점검 후 재출발 여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2011년 3월 12일 오전 8시 10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수행단을 태운 대통령 전용기에서 다급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발전소 기공식에 참석하는 이 전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 참모진, 주요 부처 장·차관 등을 태우고 이륙한 지 1시간 40분가량 지나 막 서해상으로 들어선 시점이었다.
그 직전까지 전용기 안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최악의 사태를 우려하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여기저기서 “너무 심하게 떨린다” “불시착하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나왔다. 결국 대통령경호처는 “운행에 문제가 없다”는 기장에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며 회항을 요구한 것이다.
이날 회항은 전용기 아랫부분에 있는 공기 흡인구 내 에어커버 손상 때문이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회항해 점검과 정비를 마친 전용기는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 늦게 다시 UAE를 향해 이륙했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전용기 회항사태 후폭풍은 거셌다. 대통령 전용기 정비 책임은 1차적으로 전용기가 소속된 항공사에, 최종 관리책임은 공군과 대통령경호처에 있다. 공군에 소속된 전용기가 아닌 대한항공에서 빌렸기 때문이다. 두 달에 걸친 정밀 조사 결과 비행기 제작사인 보잉의 볼트 조립 실수가 결정적 이유였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의 전용기는 대한항공에서 ‘임차’한 2001년식 보잉 747-400 기종. 7년이 지나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해외 순방 때 타고 가는 전용기도 같은 기종이다. 대통령 전용기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통령 전세기’인 셈이다. 최근 다시 전용기 구매 논의가 불거진 이유다.
○ 민간에서 빌린 ‘공군 1호기’
대통령 전용기의 공식명칭은 공군 1호기다. 별칭은 ‘코드 원(Code one)’. 경호 관계자들에 따르면 ‘코드 원’은 대통령을 뜻하는 경호 용어다.
전용기 내부는 복층 구조다. 1층 앞쪽에는 집무실과 침실 등 대통령 전용공간이 있다.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국내 상황에 대해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릴 수 있다. 대통령 전용기는 군 통수권자의 안전한 이동은 물론 유사시 내각과 군을 지휘할 수 있도록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15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도중 전용기 내에서 위성전화로 포항 지진 사태를 보고받고 대응 조치를 지시했다. 대통령 전용기에는 또 언제 있을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해 유도탄접근경보기(MAWS)와 지향성적외선방해장비(DIRCM) 등 미사일 경보와 방어 장치 등도 장착하고 있다.
전용 공간 뒤로는 최대 30여 명이 동시에 회의할 수 있는 회의실이 있다. 여러 국가를 이동해야 하는 해외 순방 일정상 진료실과 샤워실도 있다. 대통령 주치의는 물론 의무실 관계자들도 긴급 치료가 가능한 의약품을 들고 전용기에 동승한다.
전용기 내에는 청와대 선임행정관급 또는 비서관급 이상 수행원들이 앉는 공간(비즈니스클래스), 그 뒤로 경호원과 기자, 수행원들의 공간(이코노미클래스)이 있다. 일반 기종보다는 좌석 앞뒤 간격이 약간 넓다. B747-400 기종은 좌석 수가 기본적으로 416석이지만 전용기에는 200여 석만 배치됐다. 2층에는 각 부처 장관, 청와대 수석비서관급의 공식 수행원들이 앉는다.
조종은 민간항공인 대한항공 조종사가 맡는다. 항공기가 대한항공에서 빌린 전세기이기 때문이다. 기장은 해외 운항 경험이 많은 조종사 가운데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한다. 일반 항공기 조종사는 기장과 부기장으로 나뉘지만 대통령 전용기는 기장 2명이 탑승한다.
전용기 승무원으로 민간 항공사의 승무원과 공군 소속의 여군이 함께 배치되는 것도 민간 항공기와 다른 점이다. 항공사 소속 승무원들은 신원조회와 보안유지 교육 등을 거친 베테랑 중에서 선발한다. 공군에서 선발되는 여군들도 민간 항공사처럼 공중근무자 신체검사에서 3급 이상을 받아야 한다. 군 생활 중 징계나 처벌 기록이 없어야 하는 것은 물론 각종 군사훈련이나 교육에서 B등급 이상을 받아야 승무원으로 선발될 수 있다.
○ 정권마다 나오는 전용기 도입 논의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해외 방문 때 대한항공 전세기를 이용했다. 그러다 김대중 정부 때 호남 연고의 아시아나항공으로 변경됐고, 노무현 정부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교대로 이용했다. 교대 이용은 이명박 정부 초반까지 이어지다 대한항공 임차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반면 외국에선 각국 정상들의 교류가 크게 늘어난 데다 ‘세일즈 외교’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2대 이상의 전용기를 운용하는 국가들이 적지 않다. 한국도 대한항공에서 임차한 전세기 외에 1985년 도입된 미국 보잉의 737-300 기종을 공군이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공군 2호기’로 불리는 40인승인 이 전용기는 노후한 데다 항속거리가 짧아 제주도 등 단거리 노선에만 가끔씩 투입된다.
이에 한국도 전용기를 민간 항공사에서 임차해 사용하기보다는 직접 구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문 대통령이 사용하는 전용기의 임차 기간은 2020년 3월로 끝난다. 대통령 전용기 입찰과 제작에는 통상 2, 3년이 소요된다. 전용기 구입 논의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정부와 국회 모두 비행기를 임차해 사용하는 것보다 전용기를 구입하는 것이 경제성, 안정성 측면에서 낫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현재 대통령 전용기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4년간 1157억 원에 임차 계약으로 빌린 뒤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4년에는 2020년까지 1421억 원에 재계약했다. 전용기를 빌리는 데 10년간 2578억 원이 들어간 것. 통상 전용기 수명인 25년간 비행기를 빌린다면 6000억 원 이상이 필요한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의원실에 따르면 국회 예산정책처 조사 결과 대통령 전용기를 구매해 25년을 운용하면 임차하는 데 비해 4700여억 원을 절감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21일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대통령 전용기 구입을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민주당 위성곤 의원은 “대통령 전용기는 가격도 싸고 효율적이며 안전한 운영이 가능하다. 정쟁의 도구로 쓰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야당인 바른미래당 이동섭 의원도 “왜 청와대가 눈치를 보느냐. 비용 절감 차원에서 싼 것(전용기)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소신이 없느냐”고 했다. 하지만 전용기 구매 이후 각종 유지비용까지 감안하면 크게 경제적이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이에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저도 예전에 이 문제를 몇 번 다뤄봤었다. 참여정부 말기에 다음 대통령이 쓰라고 대통령 전용기 도입을 추진했는데, 국회로 문제가 오게 되면 정쟁의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용기 구입 논란은 각 당이 입장을 바꿔가며 반대해 번번이 무산돼 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에는 정부가 전용기 구입을 추진했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전용기를 구입할 예산이 있으면 전기료 5만 원을 못내 촛불을 켜고 사는 수많은 빈곤층에 따뜻한 눈길을 돌려야 한다”며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엔 공수가 바뀌어 정부가 전용기 구입을 추진하다 야당이 된 민주당이 반대해 무산됐다.
청와대는 최근 전용기 구입 논란이 다시 불거지자 일단 함구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현 시점에서 대통령 전용기 구입을 검토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전용기 구입은 아직은 검토되지 않고 있다”며 “남북문제와 경제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정쟁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전용기 구입을 검토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용해지면 언제든 전용기 구입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북한의 김정은은 참매 1, 2호기를 전용기로 이용하고 있다.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9일 한국을 찾은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북한 고려항공 소속 ‘참매 2호기’를 타고 왔다고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보도했다. 김정은의 전용기는 구소련에서 1980년대에 들여온 노후 기종 ‘일류신(IL) 62M’과 2009년 제작된 우크라이나산 신기종 ‘안토노프(AN) 148’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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