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이상주의에 빠져있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를 전하자 김태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연구실을 찾아간 것은 10월 2일 오후. 우아한(우리 아이들의 & 아름다운 한반도) 런칭을 준비하면서 그를 맨 처음 인터뷰한 것은 그가 영국 역사학자 E. H. 카의 ‘20년의 위기’ 역자였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의 20년 역사를 다루면서 평화에 집착한 나머지 나치 독일의 현상타파정책을 간파하지 못한 당시 유럽의 이상주의를 날까롭게 비판한 카의 책은 지금까지 국제정치학의 주류 패러다임인 정치적 현실주의의 바이블이다.
―카가 살아있다면 (미국은 북한 비핵화에 대해 비관론이 퍼지고 있는데) 남한 분위기는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경고하지 않을까요?
“저는 좀 다르게 봐요. 카가 변증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상주의가 타락하면 현실주의가 일침을 가하고, 현실이 무기력하면 다시 새로운 이상이 제시되는 것이죠. 플라톤의 공화국이 너무도 이상적이지만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이상이라는 힘 때문 아닌가요?”
김 교수는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10년 보수정권이 회초리를 들고 북한을 변화시키려 했지만 핵·미사일 개발과 이른바 ’완성‘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방법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들렸다. 김 교수는 카의 이 대목을 정확히 이렇게 ‘편역’ 했다(그는 저서에서 과감한 의역을 했기 때문에 번역이 아니라 편역이라고 주장했다).
―‘20년의 위기’ 편역자로서 ‘좀 걱정스럽다’ 이런 말씀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군요.
“지금 정부 안에는 북한이 개과천선했다고 믿는 사람이 일부 있을지 몰라요. 아니면 애초부터 북한은 착한 쪽이었다고 믿는거나요. 그런데 그건 아니라는 거죠.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는 TV프로그램도 있던데, 세상에 좋은 개도 없습니다. 사실은 상황에 따라서 배고프면 사람을 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본성이 사악하고 그런 게 아니라, 상황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면, 그렇게 만든 사람들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거짓말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게 현실주의 아닌가요?
“나는 구성주의적 현실주의라고 생각을 합니다. 북한을 착하게 행동하도록. 착한 행동을 하게 상황을 만들어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죠. 구성주의는 변환의 국제정치라고 말할 수 있어요. 책을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국제정치이론을 소개하면서, ‘현실주의는 난세의 국제정치이론이고, 자유주의는 치세의 국제정치이론이고, 구성주의는 변환의 국제정치이론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려 합니다.”
―북한이 대대로 개발해 온 핵미사일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가 많은데요?
이 질문에 대해 김 교수는 역시 자신이 번역한 그레이엄 엘리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결정의 엣센스: 쿠바 미사일 사태와 세계핵전쟁의 위기’를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우선 2018년 1월 1일 신년사 이후 김정은의 비핵화 협상을 엘리슨의 제1모델인 ‘합리적 행위자 모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국가이익을 추구하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하는 이 모델에 따르면 국가안보를 위해 완성단계까지 끌고 간 핵·미사일을 선뜻 포기한다는 게 설명이 잘 안된다는 것. 하지만 제2모델인 ‘조직행태 모델’과 제3모델인 ‘정부정치 모델’에 따르면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북한 핵무장 프로그램은 적자예요.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핵이 북한을 안전하게 만들었나요? 아니면 국제적으로 위대하게 만들었나요? 아니면 투입 대비 산출이 있나요? 모두 아니거든요. 그래서 진작 그만두어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왜 완성까지 갔느냐. 일종의 조직논리인 2모델과 정치적 명분의 논리인 3모델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김정은 입장에서 할아버지,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완성까지 간 것이고 올해 들어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주장했던 목적이 달성됐으니까 이제 내려놓자’고 하는 겁니다. 핵무기는 군사적 무기가 아니라 정치적 무기이니까 어차피 쓸 수가 없어요. 그러니 평화협정이 됐건 종전선언이 됐건 우리가 안전을 보장 받으면,내려놔도 되는 거다. 그리고 이제 경제로 가자‘ 이렇게 내부 설득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요.”
―회의론자들은 또 북한이 군사적 위기국면을 모면하고 핵은 그냥 보유한 채 제재를 약화시키려고 머리를 쓰고 있다고 의심합니다.
“만약 그럴 거면 김정은이 이 정도까지 나왔을까요? UN제재를 서방 국가들은 지키고 설사 중국이 제재를 완화하더라도 중국에 대한 의존만 심화되고는 상황은 김정은이 절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스리랑카니 캄보디아니, 파키스탄 등이 중국 돈 받아쓰다가 지금 중국의 식민지처럼 된 것을 빤히 보고 있는데, 김정은이 그걸 하겠어요? 그리고 북한이 살아나려면 미국이 부정적 제재(negative sanction)를 해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긍정적 제재(positive sanction)까지 풀어줘야 합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도 시켜주고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World Bank)에서 차관을 받을 수 있게 해 줘야하는 것이죠. 그래야 해외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를 하고, 북한이 차관을 들이더라도 낮은 이율로 가능한 것입니다.”
―김정은에게 정말 상당히 기대를 거시는군요(인터뷰 당시의 북미대화 전망은 현재보다는 조금 더 좋았다).
“이번에는 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낙관하는 이유 세 가지가 있어요. 위기가 워낙 컸고, 북-미 정상이 개입됐고, 그래서 보수진영이 발목을 잡을 여지가 더 작아졌다는 거지요. 다만 걱정하는 것은 북한이 늘 그랬듯이 마지막 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북한 내 보수파랄까, 어떻게 해서든 핵을 꼭 가져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사보타지(sabotage)를 할 수도 있겠죠. 조직적인 관성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그게 제일 우려스러운 거예요. 요즘 강조하는 것은 북한이 파키스탄처럼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갖는 목표를 세우면 안 된다는 겁니다. 법률적인 비핵국가의 지위를 추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정부에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시절 소위 ’햇볕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의 공을 국가 정책이 아니라 정권에 돌렸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거는 국가의 공이지, 정권의 공이 아니거든요? 그 성과를 정권적 목적으로 쓰면, 반드시 야당이 발목을 잡게 돼 있습니다. 국론이 분열되기 때문에 동력을 잃어버리거든요. 문재인 대통령이 좀 참고, 민주당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고, ’이거는 국가 프로젝트다. 무슨 노벨 평화상 받는 데에 급급하지 않을 거다. 선거에 급급할 필요가 뭐가 있냐. 이건 국가 프로젝트로 합시다‘ 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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