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을 쥐락펴락 하며 자칭 ‘핵·미사일 개발을 완성’을 선언하자 약소국인 북한이 핵을 매개로 양 강대국을 다루는 국제정치적 배경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잇따라 나왔습니다. 1년 터울로 나온 논문 두 편은 모두 외교부와 통일부에서 현장을 누빈 당국자들의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끕니다. 2008년 서훈 현 국정원장이 동국대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 ‘선군외교’라는 개념으로 북한과 미국 양국관계만 다룬 반면 오늘부터 2주에 걸쳐 소개할 두 논문은 중국을 포함해 북-미-중 3국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오늘 소개할 논문은 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이 지난달 북한대학원대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정치통일전공) ‘북한-미국-중국의 전략적 삼각관계 형성과정 - 1989~1994년간 북한의 대중 및 대미정책 변화를 중심으로’입니다. 6·25전쟁 휴전 이후 미국과 이렇다 할 관계를 맺지 못한 상황에서 한-중 수교로 중국과의 동맹관계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 북한이 1993년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라는 초강수로 1차 핵위기를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미국과 대화에 성공해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고 덩달아 중국과의 동맹관계도 강화하는 과정을 이론적인 틀과 역사적 사실로 고증했습니다.
조 대사의 논문은 북한이 미국과의 비핵화협상과, 중국과의 관계복원을 병행하면서 미·중의 전략적 이해차이를 활용해 국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직접적인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논문은 1970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후 미-소-중 3국관계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1981년 로웰 디트머가 만들어 체계화한 ‘전략적 삼각관계(strategic triangle)’ 모델을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했습니다.
논문에서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중추’로 그려집니다. (디트머는 ‘전략적 삼각관계’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행위자를 중추라고 부른다. 중략) 결국 현상을 변경하고 변화를 만들어냄으로서 삼각관계의 역동성을 부여하는 주도자(initiator)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주도자가 반드시 물리력이나 자산을 기준으로 정해지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며 ”제1차 핵위기 과정에서 북한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주도자 역할을 했다. 그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는가, 그 반대였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논의할 문제“라고 설명합니다.
논문의 본문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짧은 가설을 검증하는데 할애됩니다.
”냉전 종식의 전환기에서 북한은 NPT 탈퇴라는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중국과 미국이 북한 및 한반도에 대해 갖고 있는 전략적 이해 차이를 부각시키고 북·미·중 전략적 삼각관계를 성립시켜 중국의 동맹 방기 위험을 피하는 동시에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는데 성공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북한이 탈냉전기의 절대적인 열세를 넘어서 미국 및 중국과 전략적인 삼각관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극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냉전 후 미국이 주창하는 신국제질서의 주요 의제인 핵확산 문제를 야기함으로써 미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는 점과 둘째, 그 과정에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면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가 부각되고 이에 따라 중국이 북중동맹을 재확인하도록 만들었던 덕분이다. 미국은 핵확산을 방치할 수 없어 북한에 대해 직접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국은 북한이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북한을 감싸고 보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중소간의 삼각외교가 북한에게 정치적 자율과 군사 경제적 실리를 준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미중관계의 맥락이 탈냉전기 북한 대외전략의 핵심이 된 것이다.“
물론 조 대사가 1차 핵위기의 결과인 제네바 합의를 만들어낸 북한의 외교에 우호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비판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 때 개혁개방의 길을 포기했기 때문에 북한은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경제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지금까지도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 때 핵옵션을 남겼기 때문에(제네바 합의는 기본적으로 핵능력의 동결이었고 불능화나 폐기는 2005년 9·19공동선언의 후속조치인 2·13합의나 10·3합의에서 논의되지만 역시 실패하게 됩니다) 미국과 신뢰관계를 구축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 때 핵옵션을 남겼기 때문에 핵무장의 길을 가게 되었고, 그 결과 북한의 고립은 지금까지 심화되어 왔다. 1993-1994년 위기 당시 북한은 “제제는 곧 전쟁”이라 했지만, 지금 북한에게 제재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북한의 대외활동은 지금도 제재에 막혀 있고, 남북교류와 경제협력도 제재 때문에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을 상대한 미국과 한국에는 잘못이 없을까요? 북한이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하고 핵무기를 갖고 있는 지금에 와서 1990년 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여전히 북한의 비핵화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이상 과거의 경험에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 대사는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한미 양국의 대응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며 ”우선 미국은 이 문제를 비확산의 문제로만 본 나머지 ‘강제적인 상호사찰제도’ 등의 도입에만 매달려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인 해결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당시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북미관계의 진전을 의도적으로 제한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1992년 1월 뉴욕에서 열린 북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와 아놀드 켄터 미 국무차관의 제1차 북미 고위급 회담 이후 이어진 대선 정국에서 노태우 정부는 이른바 ‘통미봉남’을 우려한 나머지 북미대화의 진전에 제동을 거는 우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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