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가을 트럼프 대통령이 당시 국무장관과 IQ 테스트를 한번 해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특유의 자신감을 보이며 “내 IQ는 최상위다. 누가 이길지는 뻔하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죠. 트럼프는 늘 자신이 펜실베이니아 대(UPenn) 와튼스쿨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때 아닌 IQ 논쟁이 촉발된 것은 틸러슨 전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을 멍청이(moron)라고 불렀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였습니다. 바보 천치라는 뜻의 ‘idiot’ 이란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국무장관은 마이크 폼페이오로 경질됐습니다.
좀 지난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으로 승진한 최선희가 최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겨냥해 했던 독설 때문입니다. 하노이 ‘노딜’ 이후 경색국면에 빠진 북-미 비핵화 협상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볼턴을 향해 “멍청해 보인다”고 한 겁니다. ‘조미(朝-美) 수뇌’ 그러니까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해석도 곁들였습니다.
●‘개용남’ 형 수재
분위기도 안 좋은데 최선희 부상이 미국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이야기를 한데는 다 깊은 속내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 제쳐두고 일단 팩트체크부터 해볼까요? 최선희 주장처럼 볼턴은 멍청이 일까요?
일단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수재들이 가는 아이비리그 학교 중 하나인 예일대 학부와 법대를 졸업했다는 점에서 지력은 평균 이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소방관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볼턴은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1년 학비가 1억 원 이상이 되는 예일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장학금의 힘이었습니다.
예일대 졸업 당시 성적도 최우등(summa cum laude)이었고, 로스쿨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법학박사(JD) 학위를 받았습니다.
볼턴을 만나본 많은 사람들은 “신념이 다를 뿐이지 대단히 영리한(sharp)한 사람”이라며 “일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대인관계가 썩 원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게 강하다 보니 때때로 독선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요즘 각광받는 ‘공감능력’이 탁월한 캐릭터는 아니라는 평판도 들립니다.
● 트럼프의 생각은 제대로 읽고 있나?
최선희 제1부상이 날선 비판을 한 근거는 IQ가 나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협상타결을 바라는 트럼프를 방해하는 훼방꾼(spoiler) 역할을 그만두라는 주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볼턴을 트럼프에게서 분리시켜서 북한이 원하는 ‘톱다운’ 협상방식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심산이겠죠.
대통령의 참모는 대통령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내놓으며 대통령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모의 본분이죠. 그런 점에서 볼턴은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고, 그것도 대단히 영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몰딜로 흘러갈 뻔했던 하노이 협상의 흐름을 막판에 뒤집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둔한’ 참모가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전임자인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과 존 켈리 비서실장,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 이른바 어른들의 축(axis of adults)이 붕괴되면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볼턴 보좌관이 장악하고 있다는 설이 워싱턴 정가에는 파다합니다.
현재로서는 대북정책에 관한한 볼턴의 생각이 트럼프의 결정을 상당부분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선희가 주장하는 ‘볼턴=멍청이’ 시나리오는 북한의 위시풀 씽킹(wishful thinking¤부질없는 기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 조금은 걱정스러운 볼턴의 ‘신념’
다만 볼턴의 ‘독주’가 한반도의 장래에 해피엔딩을 보장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걱정스러운 대목도 있습니다. 볼턴은 자타가 공인하는 초강경파 ‘네오콘’의 마지막 보루를 자임하고 있고 철두철미한 미국우선주의자 이기 때문입니다. 볼턴의 머릿속에 대한민국의 이익은 일도 자리 잡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부시-체니-럼즈펠트’ 라는 3각 편대의 대북강경노선 속에 북핵문제는 상당기간 표류했던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논쟁적인 존재인지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유엔주재 미국대사 지명 청문회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2005년 8월부터 열렸던 인준 청문회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조 바이든 당시 민주당 상원의원은 “볼턴을 UN으로 보내는 것은 황소를 도자기 가게(china shop)로 돌진시키는 것과 같다”며 절대불가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다른 민주당 의원들도 볼턴은 외교관으로서의 성정(temperament)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고 힐난했습니다.
증인들 사이에서도 인신공격성 발언이 잇따랐습니다. 전형적으로 강자에게 아부하고, 약자는 철저히 짓밟는 스타일이라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는 상원인준을 통과하지 못하고 의회 휴회기간에 부시 대통령이 ‘임시직’으로 임명을 강행했지만 16개월 만에 자진사퇴 형식으로 유엔대사 자리에서 쓸쓸히 물러났습니다.
● 文 정부에 안 보이는 볼턴 측근
트럼프 대북정책의 ‘키맨’인 볼턴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데 불행히도 우리 정부에는 ‘볼턴 절친’이 잘 안보입니다.
하노이 북-미 회담 직전 볼턴의 방한이 무산된 것이 결국 우리정부 오판의 빌미가 됐다는 지적이 무성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볼턴 보좌관과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4월 11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일에 블레어하우스에서 볼턴이 마주 앉기는 했지만 속 깊은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볼턴이 공직에 나선 것은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입니다. 이후 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요직에서 활약했으니 우리 정부 안에도 볼턴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우리 공직자들이 낯을 가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볼턴이 정말 이상한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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