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2기를 워싱턴 특파원으로 지켜본 것을 지난해 책으로 묶어 내면서 9장의 제목을 ‘역사 문제에 묶인 한미일 유사 동맹’이라고 정했습니다. 2013년 12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면서 시작된 박근혜 정부와의 갈등은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협정이 나올 때까지 2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양국 정부와 민간이 참여해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로까지 비화된 당시 갈등은 태평양 건너 워싱턴에서 절정을 이뤘습니다. 양국 정부와 전문가, 민간단체들은 혼연일체로 워싱턴에서 오바마 행정부 설득에 나섰습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의 잔혹함을 들어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했고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 등을 들어 “한국이 자꾸 골대를 옮긴다”고 맞섰습니다. 그것은 총성없는 전쟁과 같았습니다. 북한 핵문제에 대응해 양국의 협력이 절실했지만 미국과 한국, 미국과 일본 동맹을 두 축으로 한 한미일 3국 협력관계는 ‘유사동맹’에 불과했습니다.
그 2년 동안 한국의 워싱턴 특파원들은 미국의 글로벌 정책이나 대북정책을 취재해야 할 시간 상당부분을 할애해 워싱턴의 한일 역사전쟁을 취재 보도해야 했습니다. 스스로를 ‘종군기자단’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한국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미국인들이 많아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에드 로이스 미 하원 외교위원장(공화당), 마이크 혼다 미 연방 하원의원(민주당), 티머시 휴고 버지니아주 하원의원(공화당), 샤론 블로버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카운티 의장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미국 정치인들이 한국을 지지한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류 보편적인 가치이자 미국의 가치인 인권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블로버 의장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자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초당적인 한국 지지에 동참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4년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끔찍하고 지독한(terrible, egregious) 인권 침해”라고 말했습니다. 힐러리도 국무장관 시절인 2012년 모든 공문서에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일본어 번역 표현 대신 ‘강요된 성노예’(enforced sex slaves)라는 말을 쓰라고 지시했을 정도였습니다. 두 지도자의 한일 역사문제 인식은 뚜렷했지만, 가장 중요한 아시아의 두 동맹국의 협력관계도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미국 내에서 한일 역사갈등 피로감이 커지는 가운데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2014년 12월 “내년(2015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라며 “양국이 개방적이고 친근하며 전면적인 협력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미국의 우선순위 과제”라고 말했습니다. 다음해 한일 양국이 위안부 협상의 속도를 내게 된 것도 오바마 행정부의 막후 중재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촉발된 한일갈등은 당시를 기억나게 합니다. 다시 워싱턴에서 한일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당시와 같은 미국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워싱턴을 방문하고 14일 귀국한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은 기자들에게 “미국 측에 직접적으로 중재 요청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만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12일 미국의 중재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일단은 당사국이 직접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히며 미리 선을 그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당장은 아니라도 한일 갈등이 장기화되고 한미일 협력관계에 악영향이 오면 트럼프 행정부가 끝내 개입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위안부 갈등과 무역갈등은 다른 점도 많기 때문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아베 총리의 신사 방문이라는 정치적 행위가 촉발했습니다. 이번 일본의 무역보복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외교협정(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할 수 없다는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발적 성격이 강합니다. 미국은 위안부 문제는 인류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이번 문제는 두 국가 간의 외교협정과 사법부 판단차이라는 법률적 문제로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 오바마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성격 차이도 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행정부 모두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대외정책에서 헤게모니(hegemony)를 추구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오바마 행정부의 헤게모니와 트럼프의 그것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바마 행정부가 미국 국내정치가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대외적으로 전파하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유주의적 헤게모니(liberal hegemony)를 유지한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자유주의 가치를 따지지 않는 비자유주의적 헤게모니(illiberal hegemony) 유형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 오바마의 자유주의적 헤게모니는 대외정책에서 실리뿐 아니라 ‘자유주의 가치’라는 명분을 중시하는 반면, 트럼프의 비자유주의적 헤게모니는 ‘미국의 국가이익’을 무엇보다 우선하며 필요한 경우 자유주의 가치도 버린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오바마 행정부는 인권이나 역사적 정당성 등의 인류 보편적 가치를 들어 위안부 문제에서 한국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강점기 당시 일본 기업의 강제 징용에 대한 한국 사법부의 판단에 근거한 이번 일본의 경제 보복 문제를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국가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한일관계가 악화되면 한미일 협력관계라는 미국의 이익이 악화된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기대인 것 같습니다만, 트럼프 행정부가 한일간 역사문제의 정당성이나 자유무역이라는 가치 등을 근거로 한국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업인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해서 보호무역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그의 ‘미국 우선주의’에 따르면 동북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두 동맹국 간의 복잡한 역사적 갈등관계를 찬찬히 이해하기보다는 일본과 한국 가운데 누가 더 미국의 정치와 경제에 도움이 되는 동맹인지를 우선 고려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의 팽창과 이란과 북한의 핵무장 등을 막는 국제적 이슈에 대해 어느 나라가 더 앞뒤 안 가리고 미국을 지원했는지도 볼 터입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일본을 지지하지는 않겠지만 독도나 일본해 표기 문제에서처럼 무개입 원칙을 유지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추론이 사실일 경우 지금부터 정부가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느냐가 워싱턴을 마음을 좌우한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무역 보복이라는 기습을 하고 나온 일본 정부는 이미 사전에 단단히 준비를 한 모양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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