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미치시타 나루시게(道下德成) 정책연구대학원대학(GRIPS) 교수는 시작부터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 냈습니다.
“30년 북한을 연구해 온 제 결론입니다. 절대로 예측하지 마십시오.”
솔직하면서도 용기 있는 말입니다. 극도로 폐쇄적이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집단인 북한은 이른바 ‘전문가’들의 예상을 번번이 무력화 해왔습니다. 30대 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 역시 ‘럭비공’ 적인 측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죠.
섣부른 예측은 전문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해행위’에 가깝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미치시타 교수는 북한과 관련해 미래를 내다보고 싶다면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12월 이라는 최후통첩성 ‘데드라인’을 던져둔 상태입니다. 탄핵정국에 휘말린 트럼프 행정부는 그저 상황관리 정도에만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미치시타 교수가 내놓은 4개의 시나리오입니다.
첫 번째는 이른바 ‘오케이(OK) 시나리오’ 입니다.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면서 북-미간에 관계 정상화를 위한 점진적 진전을 이뤄간다는 장밋빛 시나리오입니다. 김 위원장의 경제개혁 조치에도 속도가 붙으면서 일본을 포함한 역내 국가와 관계개선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위기국면 제2막’ 이라는 시나리옵니다. 과거에 그랬듯이 비핵화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미국이 다시 한 번 ‘코피 전략(bloody nose)’ 같은 새로운 옵션을 만지작거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선에 올인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국내정치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물론 한국과 일본에겐 악몽일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위태로운 평화(precarious peace) 시나리오입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태세를 느슨하게 가져가면서 한반도의 불안정이 커지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인데 일본정부가 가장 신경 쓰는 시나리오죠. 필연적으로 생겨날 권력의 공백에 중국의 영향력이 빠르게 확대될 경우 한반도에서의 세력전이 가능성까지 생겨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고르바초프 시나리오’입니다. 어설프게 추진된 김정은의 개혁정책의 실패로 돌아가면서 극심한 혼란이 야기되는 상황이 초점입니다.
각각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미치시타 교수는 △1번 25% △2번 20% △3번 35% △4번 5∼10% 정도로 가능성을 봤습니다. 현재의 상태가 지속되는 현상유지(status quo)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위태로운 평화’를 그 중에서도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일만한 제안이 나옵니다. 현재의 (미국 주도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 빠르게 (중국 쪽으로) 전이(轉移‧shift)할 것으로 본다는 미치시타 교수는 한국이 ‘균형자(balancer)’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반미(反美)면 좀 어떠냐’ 며 집권했던 것이 노무현 정부였습니다. 그 노무현 정부가 주창했던 ‘균형자론’은 한국이 한미동맹을 무력화 시키며 친중(親中)정책으로 나가가겠다는 선언을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었습니다.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한국(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지향성은 한반도의 세력 균형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2018년 중국의 군비지출이 2500억 달러인 상황에서 일본(466억 달러)+인도(665억 달러)+호주(267억 달러)를 다 합쳐도 중국의 절반 수준 밖에 안 된다. 한국(431억 달러)이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세력균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국이 사드배치 관련해서 한국에 대해 보복을 한 것은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균형자 역할을 제대로 이해한 셈이다. 여기서 참 안타까운 것은 대중(對中) 경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그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우리의 국익에 가장 부합하는 외교안보 전략을 세우는 것은 대한민국의 외교안보라인이 그 직을 걸고 감내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의 중국과 현재의 중국은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전후(戰後) 7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미국 바라기’만 해온 일본이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 정부가 처한 외교안보상황은 구한말의 위기와 많이 닮아 보입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어 대는 발언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고 있습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김정은 위원장과 벌써 다섯 차례 정상회담을 했지만 한국에 대한 답방은 차일피일 미루며 문재인 대통령의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최우선 국정현안으로 삼고 애지중지했건만 김정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 대한 이용가치가 더 이상 없다는 듯이 행동하기 시작한지 오래입니다. 우리의 약점을 잡은 일본의 아베 총리는 ‘원칙’을 강조하며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 않는다면 결코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키지 않을 것처럼 호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균형자’라는 표현에 트라우마가 있다고 쳐도 우리 외교의 본질은 결국 균형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탄생과 무관치 않은 한미동맹이라는 숙명, 수 천년 이상 국경을 맞대며 공존해 온 중국이라는 이웃, 그리고 정말 얄밉고 속내를 알 수 없지만 전후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맹방 일본.
줄을 타는 듯 미묘하게 처신하면서도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는데 있어서는 야무지고 당당함을 지켜내는 외교안보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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