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디지토피아

  • 입력 1997년 5월 6일 20시 02분


1970년대에는 바늘 대신에 숫자로 시간을 나타내는 전자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디지털이라고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전자시계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디지털 제품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다. 컴퓨터는 이미 일상용품이 됐고 레코드판은 CD로 바뀌었으며 액정 TV까지 등장했다. 디지털기술은 연속적인 전기파로 표현되던 아날로그 신호를 0과 1의 비트(Bit)정보로 표현하는 첨단기술이라 할 수 있다. ▼ 「디지털세계」무궁무진 예를 들어 지금까지 사진은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피사체를 찍은 후 사진관에서 현상하여 앨범에 보관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디지털기술을 카메라에 응용하면서 이러한 개념은 크게 바뀌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카메라 외에도 DVD, 디지털 TV, 지능형 자동차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미래는 디지털이 만드는 유토피아 즉 「디지토피아(Digitopia)」라 단언해도 좋을 듯하다. 디지털 문명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과거에는 물건을 사려면 시장에 가야 했고 골프연습을 하려면 골프장에 가야 했다. 하지만 이같은 상식이 이제는 흔들리고 있다. 컴퓨터의 화면상에 떠오르는 물건들을 구경한 다음 선택키만 누르면 시장에 가지 않고도 물건이 배달되어 온다. 실내에서 스윙만 해도 푸른 잔디위를날아가는흰공을볼수 있다. 집에 있어도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업무의 진행상황을 체크할 수 있고 업무결과는 통신망을 통해 보내면 된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도 바꾸어야 한다. 다가올 미래에는 가짜가 진짜처럼 느껴지는 가상의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인터넷 열풍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대표적 수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디지털의 세계가 반드시 핑크빛 「디지토피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 세계각국은 자국의 디지털 기술과 제품을 세계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세계 유수의 전자업체들도 서로 편을 달리하여 다국적 연합군을 구성하고 생사를 건 기술개발, 제품개발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디지털 사회는 엄청난 재도약의 기회를 가져다 주는 것이 틀림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나마 1만달러 소득을 가능케 한 산업화시대의 경쟁력마저 무용지물로 만들 위협이 될 수도 있다. ▼ 기회는 준비한 자의 것 과거 산업화시대의 우리 경제발전 전략은 선진국으로부터 사양산업을 인수하고 기술을 이전 받아 모방해가는 것이었다. 기술격차가 20년이상 나는 영원히 뒤쫓아가는 후발의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디지털 분야는 아직 미개척 상태이고 비교적 선진국과의 기술격차가 그리 크지 않은 분야이므로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디지털 선진국으로의 진입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부호분할다중접속(CDMA)통신장비 등 디지털 분야에서의 몇 가지 세계적 선도기술은 이러한 전망을 더욱 더 밝게 해준다. 기회는 변화를 선점하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찾아오고 주어진다. 우리도 디지털 시대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디지털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선정하고 그 육성에 국력을 집중해 나가야 한다. 이건희(삼성그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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