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나라의 고속전철 수주를 놓고 프랑스의 TGV, 독일의 ICE, 일본의 신칸센(新幹線)이 치열하게 다툰 적이 있다.
결과는 프랑스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이 수주전에서 각국은 재계와 언론은 물론이고 국가 수반까지도 기업을 지원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총력전을 폈다.
이것을 보면 이제 기업 혼자의 힘만으로는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우리는 국제화 개방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내로라하는 기업 수십 개를 합친 것 보다도 규모가 더 큰 일본의 도요타나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같은 기업들과 국내시장에서 일대 일로 맞붙어 경쟁해야 한다.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조차 국가적 지원을 등에 업고 있는 마당에 경쟁력이 미미한 한국 기업들이 홀로 나선다면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 규제와 획일 이제 그만 ▼
결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국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국민 정부 기업이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돼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서고 우리 기업이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정부는 정책을 통해, 국민은 따뜻한 이해와 격려로 기업을 뒷받침해야 한다.
이에 대해 기업은 좋은 물건을 빨리 값싸게 만들어 세계시장에 내다 팔고 거기서 얻는 이윤으로 국민과 사회에 공헌해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규제와 획일」이라는 패러다임을 먼저 바꿔야 한다.
규제는 뛰려는 사람의 손발을 묶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손발을 묶고서야 어떻게 세계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겠는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신라시대 장보고의 청해진, 고려의 금속활자, 조선의 각종 과학발명 등에서 볼 수 있듯이 2등 가라면 서러워 할 능력과 자질을 갖고 있다.
또 미국에서 조사한 각국 14세 아동의 수학(修學)능력을 보면 선진국이라는 미국이 2백55점, 영국이 2백60점인데 비해 우리나라는무려3백18점에 이른다.
이처럼 두뇌로 보나 과거의 역사로 보나 우리는 충분히 일류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
▼ 빌딩짓는데 도장 천 개 ▼
그런데 오늘의 우리 사회는 이 모든 능력과 자질을 규제와 획일로 묶어놓고 있다.
규제와 획일은 타율과 타성을 가져오고 결국에는 인간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막아 모든 사고와 행동을 오그라지게 한다.
최근 우리 기업이 고물류비 고임금 고지가 고금리의 「4고(高)와 인허가 도장이 많고, 행정처리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2다(多)」에 허덕이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규제와 획일에서 연유한 것이다.
실례를 들어 서울에 빌딩을 하나 신축할 때 필요한 행정 관서의 결재단계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1천1백15개의 도장이 찍혀야 한다.
다른 나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21세기를 향해 앞다퉈 달려가고 있는데 한참을 뛰고 달려도 부족할 우리가 이런 규제에 묶여 있다가는 선진 국가 선진기업과의 격차만 더욱 벌어질 뿐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