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코리아/인요한]일본에서 ‘제2 태안의 기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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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8일 03시 00분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그것은 우리 가족의 재앙이었다. 1984년 4월 10일 전남 순천에서 아버지의 차를 음주 운전 관광버스가 들이받았다. 중상을 입은 채 논바닥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이웃들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큰 병원으로 가세요”라는 말뿐이었다. 아버지는 이웃들의 부축으로 걸어서 응급실을 나왔고, 택시를 탔다. 아버지는 “너무 아프다. 주사 좀 놔 달라”고 했다. 이 말은 그의 유언이 됐다. 아버지는 응급실도 앰뷸런스도 아닌 택시 뒷좌석에 앉아 이웃들 사이에서 운명했다.

당시 의대 2학년이었던 필자는 분노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제때 치료를 받았더라면 그렇게 아버지를 허무하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원망만 하고 있다면 아버지가 사랑했던 또 다른 한국인들이 계속 죽어 나갈 수밖에 없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당시 한국에는 서울의 몇 군데 큰 병원을 빼면 앰뷸런스가 없었다.

몇 년 후 아버지 친구분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에서 당신의 죽음을 기리는 사업의 일환으로 앰뷸런스를 마련할 기금을 준비해 왔다. 철공과 목수를 불러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한 나머지 좌석을 뜯어낸 뒤 앰뷸런스로 개조했다. 당시 한국 앰뷸런스 디자인은 주한 외국인들이 “누워서 가는 택시”라고 혀를 찰 정도였다. 이 앰뷸런스를 시작으로 응급구조사 양성 교육과 함께 ‘인요한표’ 앰뷸런스 보급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사고사는 당시 필자와 가족에게 엄청난 재난이었지만 한국 응급체계 구축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꽃피게 한 사건이기도 했다.

개인적 재난을 떠올린 것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재앙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에 큰 피해를 줬고, 근대 한국 역사의 가장 큰 적국이다. 개명(改名)을 강요하는 등 한국 문화를 말살하려는 야만적 정책도 폈다. 또 일본은 독일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서 미움을 샀다.

이런 역사가 있기 때문에 지금 일본에 닥친 재앙은 한일관계에 있어서는 역설적으로 큰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의 경제 사회적 발전과 성과로 이미 대다수 한국인 사이에서 “일본처럼 살면 좋을 텐데…”라는 시선은 찾기 어렵다. 한국인은 자신감을 발휘할 준비가 돼 있다. 과거의 원수를 껴안는 제스처는 어려웠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푸는 데 매우 효과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해답은 한국인의 손에 달려 있다.

응급환자인 일본은 희망의 앰뷸런스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에 대한 지원이 상징적인 이벤트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적어도 2년 이상의 계획을 갖고 일본에 대한 장기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 일본은 재난이 나기 전에도 경기 침체로 이미 ‘우울증 환자’ 같았지만 이번 재난으로 중중 우울증 환자 같은 상태에 이르렀다. 국가 전체가 거대한 장례식장이 된 듯하다.

한국인들은 재건에 뛰어나다.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까지 이뤄냈다. 이 같은 능력은 지진의 폐허에서 일본을 재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2007년 12월 충남 태안 기름 유출 사건으로 서해에서 환경 대재앙이 벌어졌다. 당시 나 역시 태안에 가서 바위를 닦는 자원봉사를 했다. 하루 종일 일을 한 뒤 내가 닦은 바위 수를 세 봤더니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 10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힘을 모으자 ‘태안의 기적’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지진 피해를 돕기 위해 한국은 119구조대 100명을 파견했다. 하지만 필자는 100명이 아니라 1000명 이상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제2의 태안의 기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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