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코리아/인요한]집안의 주춧돌, 큰며느리의 삶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7월 8일 03시 00분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인류의 탄생 이래 모든 사람의 성별은 남자와 여자로 갈린다. 하지만 한국인의 성별은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남자와 여자, 아줌마다. 전남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아줌마’의 탄생에 대해 나름의 이론을 체득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한국의 보편적인 가족계획은 한 부부당 아이 7, 8명이었다. 지금보다는 더 못살았지만 한 집안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많은 아이를 함께 키웠다. 어려서부터 친구 집에 놀러가 함께 먹고 자면서 나의 눈에 가장 독특하게 각인된 사건은 한 집안에서 큰아들의 결혼 시기가 돌아오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큰아들의 색시가 한 집안에 들어오는 일은 중매를 통해 이뤄졌건, 연애를 통해 이뤄졌건 가족 구성원들이 매우 신중하고 오래 논의한 뒤 이뤄졌다.

큰 자부라는 자리의 역할과 특성은 한국 가족문화의 핵심적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며 한국 가족문화의 본질이다. 큰 자부는 한 집안에 들어온 이후 해당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소사의 원인 제공자였다. 집안에서 일어난 ‘흉한 일’에 대해 특히 그랬다. 큰 자부가 들어온 뒤 노인이 아파도, 농사가 잘 안 돼도,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나도 모두 큰 자부 탓이었다. 집안 어른들뿐 아니라 마을 어른들까지 그렇게 판단했다. 시어머니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으며, 남편의 절대 권력 아래 있었다. 기독교 선교사의 아들인 내 눈에 큰 자부란 ‘작은 예수’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큰 자부가 아들을 둘쯤 낳으면 변화가 시작됐다.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거나 돌아가신 뒤 변화는 실체를 드러냈다. 아이들은 집안의 대소사를 아버지 대신 어머니와 의논했다. 때로 아버지도 모르는 은행 계좌와 땅 몇 마지기가 큰 자부의 이름으로 발견됐다.

시어머니에게서 큰 자부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동서들로부터 “형님”이라 불리는 큰 자부는 명칭뿐 아니라 실제로도 가족이라는 조직의 형님 역할을 했다. 자신의 남편에게 불리하게 행동하는 동생이 있으면 동서를 통해 서방님을 조종했다. 늙은 남편은 결혼식과 장례식의 가족 대표가 되는 일 외에 할 일이 없지만 큰 자부는 대가족의 복지를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집안의 실질적 대표로 기능했다.

이 완전한 한국 여성의 해방은 당시 전라도에서 최고 인기 관광지였던 경주를 향해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절정을 이뤘다. 버스는 흔들리고 누구의 질타도 개의치 않는 태도로 자유를 표현했다. 55세가 넘은 아주머니들이 술뿐 아니라 담배를 배우는 경우도 많이 봤다.

오늘날 한국 여성들은 이런 실질적 권력뿐 아니라 사회에서 보이는 권력 역시 당당히 누리고 있다. 50세가 넘은 요즘 내 주변에는 부인에게 어려움을 당하는 남성이 적지 않다. 직업을 잃고 돈을 벌어오기 힘들어지자 이혼을 당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인생을 헛살았다는 이들에게서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을 장악해 온 한국 여성들이 이제는 겉으로 보이는 것까지 가져간다는 푸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제16회 여성주간이 7일로 막을 내렸다. 한국 여성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 남성들은 푸념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의 주류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을 만든 배경에는 ‘작은 예수’처럼 묵묵히 근거 없는 비난과 고통까지도 감내한 ‘한국 아줌마’들의 저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서양 사회가 예전과 달리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든 데는 가정의 실패가 한몫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국 역시 급증하는 이혼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가장들이 설자리를 잃어가는 지금 우리는 남성의 위치를 회복시키고 가정을 바로 세워줄 ‘큰 자부들’이 필요하다.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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