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코리아/인요한]한국의 ‘감정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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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8일 03시 00분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10여 년 전 일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가문 일원이 참석하는 회의가 열렸다. 한국에 정착한 유명한 선교사 가문으로는 알렌가(家)와 언더우드가, 그리고 나의 진외조부 유진 벨의 후손인 린튼가 등이 있다. 알렌가와 언더우드가는 미국 북부지역 북장로교에 뿌리가 있고, 우리 집안은 미국 남부 남장로교 출신이다.

회의 도중 언더우드가 3대손과 그의 아들들인 4대손 두 명이 다투기 시작했다. 큰 안건도 아닌데 다투는 정도가 심했다. 나는 두려웠다. 미국 남부 문화는 북부와 달리 아무리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가족간 언성을 높여 싸우는 일은 금기로 여긴다. 싸우려면 몇 년 동안 얼굴을 보지 않을 것을 감수해야 한다.

논란을 빚은 안건은 결국 회의에 모인 30여 명의 표결을 거쳐 다수결로 결론을 냈다. 투표 결과보다 나는 언더우드 가족들의 향후 행보가 더 궁금했다. 서로 잡아먹기라도 할 듯 싸우던 그들은 총회가 끝나자 “아까 우리 정말 대단하게 싸웠지? 거 봐라, 다수결에 의해 결정됐잖아”라며 서로 등을 치고 웃으면서 회의 장소를 빠져나갔다.

이처럼 민주주의에는 감정이 필요 없지만 한국에서는 종종 감정이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것 같다. ‘해머 국회’가 전 세계로 널리 알려져 망신살을 치른 일이 생생한데 아직 국회에서는 의장실을 점거하거나 의사봉을 빼앗는 등 물리력을 행사하는 일이 생긴다.

민주주의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갈등을 어떻게 조율하고 타협하는가에 있다. 갈등을 해결하는 ‘차가운’ 이성과 그 과정에서 사람이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뜨거운’ 감정을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을 처리하기 힘들기 때문에 차라리 감정이 생겨날 일을 만들지 않는 상황도 많다. 나는 10군데 기관 혹은 단체의 이사로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그런데 회의에 가 보면 대부분 회의 전에 주요 안건에 대한 결론이 나 있다. 미리 조율해 놓고 회의에서는 형식만 갖추는 식이다. 회의의 본질은 토론이고, 이를 통해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다. 감정을 회의 절차에 개입시키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아예 싸움을 피하는 일 역시 건강하지 않다.

또 한 차례의 선거가 끝났다. 집권 정부와 다른 생각을 가진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치열하게 싸운 만큼이나 앞으로 정치 과정도 뜨거울 것으로 예상된다. 타협과 협상을 위해 다투는 과정과 감정을 갖고 다투는 과정을 깔끔하게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늘 선거가 끝나면 후유증이 남는다. 선거만 치르고 나면 깊은 상처가 남고 상처가 아물지 않고 큰 흉터로 남아서 원수진 사람도 많다. 이번 선거도 예외 없이 흑색 비방전이 심해서 나조차 지금 두 후보의 정책이 뭔지 물어본다면 대답하기 힘들 정도다. 후보들의 공약보다는 비방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서울시장은 국정 운영에 있어 대통령에게 중요한 파트너다. 청와대와 여당은 새 시장을 ‘반대파’가 아닌 ‘시장’으로 대우하고, 그가 펴는 정책에 대해서도 충분히 토론과 논의를 거쳐 들여다보았으면 한다. 당선자 역시 경쟁했던 상대를 무시하지 않고 공약 가운데 좋은 정책을 실제로 가져다 쓰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한국에서는 선거에서 당이 바뀌면 사람과 정책이 모두 일거에 바뀌곤 한다. 심지어 ‘정치 보복’도 생겨난다. 하지만 덩치가 클수록 이 같은 이동 과정에는 비용이 많이 발생하고, 그 비용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한국은 권력의 유지 혹은 이동을 경험할 선거를 내년에 치르게 된다. 진짜 민주주의 과정을 학습할 기회가 될지, 아니면 사회적 비용만 잔뜩 발생시킬지는 한국인의 선택에 달렸다.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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