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갈수록 꼬이는 현대 '금융갈등'

  • 입력 2000년 3월 16일 19시 35분


현대그룹이 이익치(李益治)현대증권 회장의 인사문제로 사흘째 내홍을 앓고 있다.

정몽구(鄭夢九)현대자동차 회장측과 정몽헌(鄭夢憲)현대전자 회장측 사람들은 16일 서로 상대를 가리켜 ‘쿠데타 세력’이라고 부를 만큼 양측의 갈등이 깊어가고 있다.

이익치회장은 16일 오전 현대증권 임원회의를 주최해 “아직 인사가 확정되지 않았다”며 “회사가 어수선하더라도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해 달라”고 말했다. 이회장의 발언에 대해 정몽헌회장 계열 인사(MH라인)들은 “정몽헌회장이 이번 인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대신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또 “정몽헌회장은 무엇보다 자신이 해외에 나가 있는 사이에 상의절차도 없이 인사를 한 데 분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회장의 측근들은 이회장이 회의를 마치고 중국 상하이로 출국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포국제공항 출국기록에는 이회장 이름이 나와 있지 않아 국내에서 잠적 중인 것으로 보인다.

정몽구회장측 인사(MK라인)들은 이날 이회장의 발언을 전해듣고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이 결재한 인사를 거역하는 것은 반란”이라며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MH라인 역시 “현대증권의 대주주인 정몽헌회장이 외국에 나간 틈을 타 연로한 명예회장을 설득해 인사를 한 것은 12·12쿠데타 세력이 최규하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내 정승화총장을 연행한 행동과 같은 것”이라며 MK측 인사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현대증권 임원들은 “대리급 인사도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데 최고경영자를 이런 식으로 갈아치울 수 있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한편 그룹측에서 “16일부터 현대증권으로 출근하라”고 지시를 받은 노정익(盧政益)현대캐피털 부사장은 이날 평소 출근시간인 오전 7시보다 훨씬 늦은 오전 10시경에야 현대캐피털에 잠깐 출근했다가 오후에는 현대증권으로 출근, 두 2세간의 갈등에 끼어 곤혹스러운 전문경영인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양측간의 갈등을 단숨에 해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정주영명예회장은 16일오후 예정됐던 아산재단 장학증서 수여식 참석 스케줄을 취소하고 오전 5시반 갑자기 울산으로 내려갔다. 정명예회장은 이날 조충휘 현대중공업사장 등 계열사 사장 임원 30여명과 오찬을 갖고 사장들로부터 각사 현황을 보고받았다.

오찬 도중 정명예회장은 평소 애창곡인 ‘가는 세월’과 ‘이거야 정말’이라는 유행가를 불렀다는 것이 오찬 참가자의 전언. 자식들의 다툼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정명예회장의 행동을 놓고 그룹 내부에서는 ‘형제간의 갈등을 스스로 풀라는 메시지다’ ‘재산다툼을 벌이는 자식들이 보기 싫어 지방에 내려갔다’는 등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양측 인사들은 이익치회장 인사문제를 둘러싼 두 형제간의 갈등이 정몽헌회장이 내주초 귀국, 정몽구 회장과 담판을 지어야만 풀릴 수 있을 것으로 보는 데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한편 이번 사태와 관련해 다른 재벌그룹 경영인들은 “전근대적 소유구조가 빚은 추악한 재산싸움”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사회적 비판여론이 재계 전체에 확산될 것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이병기·최영해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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