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전통酒 ‘비틀’ 외국술만 ‘흥청’

  • 입력 2002년 1월 30일 17시 26분


프랑스 남서쪽 보졸레 지방의 포도 재배 농민들에게 한국인과 일본인은 매우 고마운 사람들이다. 한국과 일본은 이들이 생산하는 햇포도주인 ‘보졸레누보’의 신흥 소비국으로 최근 몇 년간 놀라울 정도로 수입량을 늘렸기 때문. 보졸레 농민들의 소득에 적잖은 도움이 될 정도.

지난해 11월 셋째주 목요일 자정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등 전국 곳곳에선 보졸레누보를 손에 들고 건배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1990년대 후반에 처음 한국에 수입되기 시작한 보졸레누보는 작년엔 200만병 이상 들어올 만큼 이상(異常)열풍을 일으켰다.

이 같은 급증세는 다름 아닌 보졸레누보의 치밀한 마케팅의 개가다. 보졸레 지방 농민들은 50년대부터 보르도나 부르고뉴산 와인에 비해 덜 알려진 자기네 와인의 판촉 전략으로 이를 축제와 연결해 히트상품으로 만들어냈다. 11월 셋째 목요일 이전에 팔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도 관심을 끄는 촉매 역할을 했다.

작년 한국의 술 소비량은 세계 최고수준. 그러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한국인이 마시는 술의 대부분은 우리 것이 아닌 외국산 술이다. 양주 맥주는 물론 소주도 원래 일본식 희석식이니 우리 것이라고 하긴 힘들다. 작년 전체 술소비량 8조원 중 전통주는 겨우 1500억원 정도. 그나마 이것도 최근 전통주인 ‘백세주’가 선전하면서 많이 올라간 것이다.

대조적인 두 장면은 한국의 비정상적인 술문화의 상징적인 단면이다. 한국의 술, 우리만의 술을 갖지 못한 탓에 한국인은 쉽게 남의 술에 열광하는, ‘뿌리없는’ 술문화를 갖게 된 것. 전통주 연구가인 김기은 선양소주 기획실장은 “한국처럼 전통주가 전멸한 나라, 외국 술이 판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전통의 단절〓중국만 해도 지방마다 특이한 전통주들이 유명하다. 마오타이, 공푸가주는 세계적인 명주(名酒) 대열에 올라 있다. 중국은 이렇게 전통주가 강해 위스키 등 양주가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일본도 전통주 보호정책을 펴 청주회사가 2000개나 된다.

한국은 그런 전통이 없어서 안될까. 사실은 정반대다. ‘음주 가무를 즐기는 민족’이라는 기록처럼 ‘고개를 넘으면 술맛이 다를’ 정도로 지방마다 집집마다 독특한 맛을 내는 가양주(家釀酒) 전통이 수백년간 내려왔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일제 강점기에는 물론 광복 이후에도 통제 일변도의 주류 정책에 숨이 막혀 고사해버렸다.

1910년대 일본총독부가 가양주 신고를 받았을 때 등록한 가정과 업소는 무려 40만곳.

시장에서 판매되는 전통주만 2000여 가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제는 술에 세금을 물리려고 주세령을 공포하면서 아무나 술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바람에 1930년대엔 제조 가능한 전통주가 수십여종으로 격감했다.

광복은 일제에 의해 말라버린 전통주의 명맥을 되살릴 기회였으나 역대 정부는 일제의 주세정책을 그대로 따라 스스로 씨를 말려버렸다. 1960년대에는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분으로 만든 식용 알코올인 에틸알코올에 물을 섞어 마시도록 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전통주마저 사라져갔다.

▽뒤늦은 시도, 전수자 거의 없어〓정부는 90년대 들어 전통주 살리기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나 살릴 만한 전통주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제조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았고 관련 문헌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백세주와 같은 약주, 막걸리로 불리는 탁주, 안동소주 등 전통 증류식 소주 등 전통주는 단종(斷種)의 위기를 맞은 지 오래다.

제조기법이 지금까지 전수되고 있는 술은 문배주와 안동소주 정도. 문배주 이기춘 사장은 “많은 전통주들은 사실 대부분 우리의 옛 것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라며 “같은 전통주라고 얘기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해 1000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린 백세주를 개발한 국순당의 성공은 이렇다 할 전통주가 없는 상황에 대한 소비자들의 아쉬움을 간파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세주의 성공은 우리 전통주의 약진과 함께 몰락의 현주소를 동시에 보여준다.

▽전통주는 문화상품〓전통주를 문화상품으로 여기는 인식이 필요하다. 전통주를 빚고 상품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온갖 규제도 철폐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약주의 경우 알코올 도수를 13도 이하로 맞춰야 하고 누룩 사용이 의무화돼 있다. 또 알코올 첨가가 엄격히 금지돼 있는 데다 심지어 숙성기간도 정부가 규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청주는 알코올 사용이나 도수 제한 등의 규제가 거의 없다.

일정 부분에서는 정부의 육성책도 필요한 단계다. 독일의 영세한 맥주 제조업자들에게 세율을 우대 적용하는 것처럼 영세한 전통주 업자들에게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은 국제적인 관례다.

주류 마케팅 전문가인 중앙대 정헌배 교수는 “똑같은 사람들이 만드는 전통주의 맛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실정”이라며 “하루빨리 문헌 고증을 통해 정확한 전통주 제조기술을 찾아내 전통주의 표준을 세우는 노력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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