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의 고민을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김씨는 거래하는 H은행 지점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득 수준, 아파트 상황 등을 한참 설명해야 하는데 누가 들어줄지 감감했다. 김씨는 마침 종신보험에 가입해 달라고 전화를 걸어 온 외국계 보험사의 라이프 플래너에게 “조언해 주면 가입하겠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설명하기에 벅차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김씨는 결국 ‘다른 경로’를 통해 하나은행 프라이빗 뱅킹(PB)팀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굳히게 됐다. 그는 ‘입주 전 매각’을 결심했다.
▽PB는 은행들의 알짜 수익원〓투자상담 전문가들이 비교적 ‘큰손’ 손님들에게 상담해주는 PB 시장을 놓고 은행들이 격돌하고 있다.
한빛은행은 최근 3개월 사이에 서울 강남-경기 분당 지역에만 4곳의 PB지점을 열었다. 조흥은행도 올 하반기 독립지점 개설을 위해 준비중이다. 하나 한미 신한 등 후발은행이 선점했던 PB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선발은행이 뒤늦게 뛰어드는 양상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PB업계의 ‘맏형’은 94년 일찌감치 시작한 하나은행.
PB 업무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 잘 나타나 있다. 살인혐의로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 주인공은 혹독한 영어(囹圄)생활을 버티기 위해 교도관들의 투자상담은 물론 절세(節稅)기법, 돈세탁 방식까지 ‘자산관리’를 도맡아 한다. 프라이빗 뱅커는 통장개설 송금 지로납입 등 고객이 요구하는 사항을 실행하는 ‘텔러(Tel-ler)’와는 차원이 다른 서비스를 제공한다.
은행들이 PB에 뛰어드는 것은 ‘돈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시중 A은행은 내부 자료를 통해 “전체 개인고객 약 1200만명 가운데 예금기준 상위 0.97%가 예금액의 54%를 차지하고, 상위 예금자 10%가 은행수익의 87%를 낸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나은행 김희철 PB지원팀장은 “PB지점은 비싼 임차료, 2억∼5억원대의 인테리어 비용, 최정예 직원의 인건비 등을 고려해도 억대 예금고객을 상대로 한 VIP 마케팅은 분명한 수익원”이라고 말했다.
▽자녀문제까지 상담〓거액예금자 유치경쟁이 치열해지면서 PB의 개념도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있다.
과거엔 푹신한 소파에 고객을 따로 모신 뒤 지점장과 커피를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특권’이나 최고급 인테리어가 갖춰진 사무실에서 거래를 하는 서비스가 차별화한 포인트였던 것이 사실. 그러나 하나은행 김 팀장은 “이제는 시설보다는 고객이 ‘최정예 재테크 전문가가 내 돈을 안정적으로 굴려주고, 세금 부동산은 물론 자녀문제까지 상담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진짜 PB”라고 말했다.
한빛은행 김인응 과장은 “부동산 시장이 좋으면 ‘은행 상품을 줄여서라도 부동산 투자를 늘리라’고 조언할 수 있어야 진짜 신뢰가 생긴다”고 말했다.
▽오페라 초대 등 이벤트 경쟁〓‘PB 전쟁’이 이어지면서 은행간 아이디어 싸움은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B은행은 지난해 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정식 공연을 하루 앞두고 B은행 고객만을 위한 예비 공연을 마련했다. B은행 관계자는 “입장권 구입경쟁이 벌어진 뮤지컬을 남들보다 먼저 무료 초대받은 고객들이 ‘특별한 서비스’에 만족했다”고 말했다. 이 행사엔 예금자산이 30억원이 넘는 고객 400명이 대상이 됐다. 한미은행도 올 1월 부산지역 고객만을 위해 저녁식사를 곁들인 ‘성악가 조수미 독창회’를 준비했다. 또 “우리 아들 장가 좀 보내달라”는 고객의 요청에 따라 PB고객 30쌍의 맞선을 주선한 은행도 생겨났다. 내달 초 첫 커플이 혼인할 계획.
물론 “PB 시스템이 ‘부자들의 끼리끼리 문화’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은행들은 “고객이 제값을 내고 서비스를 받고자 하고, 은행도 핵심 고객을 위한 최소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라는 반응이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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