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상표-포장 속 비밀 아시나요”

  • 입력 2002년 3월 7일 17시 31분


상품의 ‘주민등록증’이라고 할 수 있는 상표와 포장지. 소비자들은 유통기한 정도나 한번 확인할 뿐 무심코 지나쳐버린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엔 숱한 정보와 사연이 들어 있다. 거기엔 업체가 제품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반면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숨기고 싶은 진실’도 담겨 있다.

업체들은 소비자 보호를 위한 각종 표기 규정에 따라 일정한 상품 정보를 의무적으로 표시해야 한다. 그 규정은 일종의 ‘유니폼’이자 올가미다. 업체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그 획일화와 구속의 틈을 비집고 교묘히 줄타기를 펼친다.

상표 속의 ‘행간(行間)’에는 그런 두뇌게임이 숨어 있다. 그래서 ‘상표 속의 비밀’을 읽어내는 것은 퍼즐을 풀 듯 재미있는 게임이다. 상품을 제대로 알면 물론 소비도 그만큼 즐거워진다.

▽숨기고 싶은 진실〓국산 소주 대부분은 ‘稀釋式 燒酎(희석식 소주)’라는 어려운 한자어를 상표 구석에 쓰고 있다. 흐릿하게 인쇄돼 있어 눈에도 얼른 들어오지 않는다. 제품의 속성에 관한 중요 정보를 왜 이렇게 숨겨놓듯 적었을까.

해답은 희석식 소주의 역사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들여온 희석식 소주는 화학주라는 인식 때문에 소비자들로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킨 전력(前歷)을 갖고 있다.

기업으로서는 이렇게 거부감을 주는 정보를 피하고 싶다. 그래서 소주업체들은 오래 전부터 이를 어려운 한자어로 표현하고 있다.

소주 상표에 큼지막한 상품명과 대조적인 조그만 글씨로 쓰인 ‘19세 이하 미성년자에게는 팔지 않습니다’는 문구도 오랜 줄다리기의 산물. 청소년보호위원회로부터 오랫동안 이 문구의 기재를 요구받아온 주류업계는 90년대 중반부터 이를 넣고 있다. 업계 내부에서 몇 년간 문구 수위를 놓고 이견을 벌이기도 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라는 문구도 법적으로 규정된 것. 그러나 업체들은 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을 이 경고문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상표 한쪽에 감추고 있다.

▽자일리톨 껌의 열량은 얼마?〓롯데제과의 기능성 껌 자일리톨 포장지를 보면 초기 제품과 요즘 파는 제품의 열량 표시가 다르다. 롯데는 당초 열량을 개당 0㎉로 나타냈다. 그러나 최근 나오는 제품은 ‘2개당 5㎉’로 바꿨다.

반면 해태는 처음엔 ‘2개당 5㎉’로 했다가 신제품에는 개당 0㎉로 표기했으나 최근 다시 2개당 5㎉로 표기를 바꾸는 중이다. 식품위생법상에는 ‘열량은 5㎉ 단위로 표시하되 그 미만은 0으로 표기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자일리톨껌 한 개의 열량이 2.5㎉이므로 이를 무시할 수 있다.

롯데는 “처음에 한 개로 기준을 잡은 것은 소비자들이 한 번에 한 개씩 씹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나 대부분의 소비자가 한 번에 두 개씩 씹는다고 조사돼 바꿨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청소년들의 다이어트 심리를 의식해 저(低)칼로리를 내세우려는 의도. 하지만 ‘한 개보다는 두 개씩 씹는 게 낫다’고 본 산술이 상충한 흔적이 엿보인다.

▽‘딸기우유’는 없다〓소비자들이 흔히 딸기우유, 초코우유라고 부르는 제품들도 숨은 사연이 있다. 이들 제품을 자세히 보면 업체 이름을 딴 ‘○○우유’라는 제품명 밑에 딸기, 초코라고 표기가 돼 있다. 원재료가 30% 미만이거나 향료를 사용한 경우 원(原)재료명을 제품이름에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바나나우유는 생바나나를 쓸 경우 신맛이 나거나 떫어지므로 천연향료를 사용한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바나나 맛’ 우유다. 제일제당 ‘메밀맛면’도 메밀 함량이 30%에서 약간 모자라기 때문에 나온 이름이다.

샘표식품의 ‘맑은 조선간장’은 자칫 이미 판매중인 제품의 이름을 바꿔야 할 뻔했다. 7년간 연구개발해 나온 이 제품은 식품공전(公典)의 간장 규정에 부닥쳤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콩으로만 만들었고 제조과정이 조선간장과 비슷하며 맛도 조선간장 맛이지만 사각형의 메주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간장’이라 표기할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결국 샘표식품의 이의제기가 받아들여져 날콩 메주로 만든 것도 사각메주와 마찬가지로 한식간장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조선간장맛 간장’으로 하든가, 뭔가 다른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포장지가 비좁다〓‘사용후 포장재는 반드시 분리수거하여 주십시오’라는 문구는 의무사항이다. 환경문구를 반드시 넣도록 돼있기 때문.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회사마다 창의성(?)을 발휘했다. 한 제과업체는 ‘자연을 푸르게 환경을 깨끗이’라는 문구를, N사는 ‘자연을 아름답게 사회를 아름답게’라는 표어를 개발했다.

5가지 주요 원재료를 표기하게 돼있는 의무사항도 겉봉을 빽빽하게 만든다. ‘쌀수제비’는 소비자가 생각할 때는 한 제품. 하지만 반죽부분, 국물스프, 건더기스프의 3가지로 간주돼 15가지의 원재료를 적어야 한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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