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한국펀드 길고 크게 가자”…개수만 세계2위

  • 입력 2002년 3월 11일 17시 06분


삼성투신운용이 운용하는 주식형 수익증권인 삼성에버그린펀드는 한국 증시에서는 보기 드문 ‘장대(長大)화’ 펀드다. 말 그대로 오래가고 규모가 큰 펀드라는 뜻. 1999년 2월 9일 태어난 이 펀드는 11일 현재 나이가 만 3년1개월이고 자산은 815억원이다.

이보다 일주일 일찍 태어나 프랭클린템플턴투신운용이 운용하는 템플턴그로스1호 펀드 역시 ‘장대화’ 분야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현재 자산은 636억원.

두 펀드는 외국의 대표펀드에 비하면 갓난아기에 불과하다. 미국의 마젤란 펀드는 63년에 태어나 자산규모가 99년 1000억달러(약 130조원)를 넘기도 했고 현재도 768억달러(약 99조8400억원)다. 24년에 태어난 MIT펀드는 자산이 100억달러(약 13조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펀드의 ‘단소성’〓한국은 펀드의 천국. 미국투신협회(ICI)의 자료에 따르면 2001년 5월 말 현재 한국의 펀드는 7604개로 조사대상 33개국 가운데 미국(8290개) 다음으로 많다.

그러나 펀드의 평균 운용자산은 197억원에 불과해 최하위권인 29위. 이에 비해 미국 펀드의 평균 자산은 1조886억원으로 한국 평균의 100배에 가깝다.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 선진국의 펀드 평균 자산도 모두 한국의 10배 이상이다.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 2일 현재 국내 펀드는 6636개 평균 자산은 245억3000만원이다. 작년 한해 동안 3242개의 펀드가 사라지고 1543개가 탄생됐다. 한 달에 270개가 없어지고 128개가 새로 태어난 셈이다.

▽왜 장대화인가〓템플턴그로스1호의 경우 99년 이후 이달 2일까지의 누적수익률은 90.28%로 같은 기간 시장평균수익률(종합주가지수 상승률)인 44.56%의 두 배다. 2000년 이후 누적 수익률은 71.59%, 2001년 이후는 116.69%로 모두 시장평균인 -20.24%와 57.40%보다 높다. 삼성에버그린의 경우는 최근 6개월 수익률이 54.88%로 시장평균수익률보다 11.16%포인트 높았다.

한국펀드평가 우재룡 사장은 “장대화 펀드는 시장을 안정시키고 안정적인 수익을 낸다”고 말한다. 일정한 규모 이상의 큰 자금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 운용하는 펀드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시장이 크게 출렁이는 일이 적다는 것. 또 펀드가 크면 펀드매니저의 운용 폭이 넓고 위험을 충분히 분산할 수 있어 수익을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작은 펀드를 수십개씩 운용하는 대다수의 펀드매니저들은 투자 종목을 고르고 펀드를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펀드매니저 김모씨(33)는 “40여개의 펀드를 운용하는 것은 교사가 콩나물 교실에서 학생들 출석점검을 하느라 수업을 못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라며 “아무래도 일부 중요한 손님과 잔소리가 심한 손님이 가입한 펀드에 신경을 더 쓰게 된다”고 말했다.

또 펀드 규모가 작으면 보통 100억원 단위로 거래되는 채권이나 삼성전자 등 값이 비싼 주식은 제때 마음껏 살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현실〓그렇다면 왜 단소(短小) 펀드가 절대다수를 차지할까.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펀드의 단소화 현상은 기복이 심한 한국 증시, 새 것을 좋아하는 투자자, 그에 맞춰 상품을 팔아야 하는 판매사의 합작품이라고 말한다.

성금성 현대투신운용 이사는 “증시가 빨리 달았다가 빨리 식고 투자자의 돈도 빨리 들어왔다 빨리 나가는 현실에서 큰 펀드를 오래 유지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곽수환 굿모닝증권 금융상품부 차장은 “법인 고객은 자기의 돈만으로 만들어진 ‘단독펀드’를 원한다”며 “이 펀드는 규모가 작고 돈을 찾아가면 즉시 사라진다”고 말했다.

자랑할 실적이 없어서 새 펀드를 양산하는 투신사의 마케팅 전략도 한몫을 하고 있다.

▽좋은 펀드가 증시를 바꾼다〓결국 큰 펀드가 오래 살기 위해서는 운용사와 판매사, 투자자 모두의 노력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삼성에버그린도 99년 자산이 1600억원까지 불었다가 2000년 이후 시장이 폭락하며 투자자들이 이탈하기도 했다. 김영준 주식1팀장은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내재가치를 보고 고른 종목들에 자산의 90% 이상을 투자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과 프랭클린템플턴 두 회사는 이들 펀드를 한국의 대표펀드로 키워갈 계획이다. 후발 상품인 굿모닝투신운용의 베스트그로쓰나 한국투신운용의 그랜드슬램, 대한투신운용의 갤롭코리아 등도 같은 취지로 만들어진 펀드들이다. 한국펀드의 장대화 실험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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