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소비자 안전 위협할 ‘빈틈’ 없애라

  • 입력 2002년 4월 2일 17시 23분


1단계부터 4단계까지 날짜와 항목이 적힌 도표. 하나라도 빠지거나 늦어서는 안 된다. 군사작전 같은 이 프로젝트의 마무리 시한은 6월 중순.

제일제당의 제조물 책임(PL·Product Liability)법 준비를 총지휘하는 품질경영팀 김민규 과장은 도표를 한 손에 들고 연구개발(R&D)센터부터 고객상담실까지 누빈다. 식품 화장품 등 1000여종의 소비재를 만들고, 계열사로 홈쇼핑까지 운영하는 제일제당은 PL법의 ‘지뢰밭’.

미국의 다우코닝은 98년 유방확대 수술 재료인 실리콘의 이상으로 부작용을 호소하는 고객이 생겨 PL법에 따른 배상금(32억달러) 지급판결을 받았다. 다우코닝은 곧 파산을 신청했다. 미국의 한 화장품 업체는 얼굴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생긴 여성고객에게 200만달러를 지급했다. 화장품 포장지에는 부작용 경고문구가 없었다. 배상금도 문제지만 이미지 손실과 매출 감소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7월1일로 다가온 PL법 시행을 앞두고 자동차 전자 유통 식품 등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법 공포 후 1년6개월의 유예기간을 두고 다시 2001년 10월에서 2002년 7월로 시행을 연기했는 데도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PL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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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등의 불〓제일제당은 자동차 업체에서 수출차량의 PL관련 업무를 맡던 2명의 컨설턴트를 고용했다. 사업부별로 2∼5명씩 구성된 PL태스크포스팀도 운영된다.

지난달 사업부별로 ‘표시사항 검토’가 완료됐다. ‘이 캔은 손을 다칠 우려가 있습니다’라는 경고문을 ‘손을 다칠 수 있으니 이러저러하게 사용하십시오’라고 고치는 식. 미국의 국제규격(표시 및 경고사항에 대한 가이드)을 기준으로 표시문구의 크기, 색, 이해도 등을 점검하는 체크리스트에 따라 제품 포장지를 세심하게 살핀다.

쌍용자동차도 최근 무쏘 차량설명서의 ‘자동변속기 오일 무교환’을 ‘3만㎞마다 점검해 필요하면 교환’으로 바꿨다.

R&D와 제품기획부터 판촉까지 생산단계별로 ‘소비자 안전’을 위해 꼭 점검해야 할 것을 정리한 매뉴얼도 마련됐다. 기획 단계라면 소비자 조사를 했는지, 안전성 테스트를 했는지 등을 체크해야 한다.

소송에 걸릴 경우엔 제품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이 문서로 남아 있어야 한다. 말로 진행되던 일을 문서화하고, 각자 다르게 사용하던 문서양식도 통일했다. 제품마다 안전성 조사 결과, 소비자 테스트 결과 등 근거자료도 문서로 준비 중이다.

제일제당은 연평균 4000건의 고객 불만사항을 접수한다. 이를 PL성 클레임과 아닌 것으로 구분해야 한다. 예컨대 ‘햇반’에서 돌이 나온 것만으로는 PL대상이 아니고, 돌을 씹어 치아가 상했다면 PL적용 대상이다. 클레임을 판별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심각한 클레임이 생기면 즉각 위원회가 구성되는 조기경보시스템도 마련했다.

가전업체들도 내수용 제품 품질 기준을 PL법을 시행 중인 미국에 수출하는 제품 수준으로 바꾸고 있다. 외관 재질을 불에 타지 않는 소재로 바꾸고 부품을 고급화하는 것. 엘리베이터업체나 유통업체들도 문제가 생길 경우 협력업체와 제조업체, 혹은 유통업체가 어떻게 책임을 분담할 것인지 계약서상에 명시하는 등 ‘발등의 불’로 다가온 PL 대비에 한창이다.

▽강 건너 불〓가스보일러를 만드는 한 중소기업. PL컨설팅을 받기로 한 이 회사 K사장은 “가스는 안전규정이 이중삼중으로 돼 있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점검 결과는 허점투성이. 섭씨 170도의 고열을 뿜어내는 연통에 경고나 주의표시가 없고 소비자용 제품설명서는 전문용어 투성이라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기업이 PL에 대해 비교적 체계적인 대응체제를 갖춰나가는 것과 달리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 최근 300여 중소기업의 PL대응 실태를 조사한 중소기업진흥공단의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인 4명 중 1명이 PL이 뭔지도 모르는 실정”이라며 “PL대응책을 추진하는 곳은 10%도 안되고 절반 이상이 이제 계획단계”라고 말했다. 중진공이 올해 중소기업의 PL대응을 지원하기 위해 1만여곳에 공문을 보낸 결과 컨설팅을 신청한 곳은 단 157개.

한국PL센터의 임영주 소장은 “전사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문제인 데도 많은 기업들이 고객상담실만 교육하거나 보험 가입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김&장 법률사무소의 김성진 변호사는 “규모가 큰 기업도 PL대비를 불필요한 비용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며 “이제 제품의 질을 따질 때 기능, 효능, 디자인뿐만 아니라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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