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디자인을 혁신하라…"21세기 경쟁력 좌우"

  • 입력 2002년 4월 21일 18시 08분


LG전자의 최고경영자(CEO)인 구자홍(具滋洪) 부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21세기는 디자인이 제품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구 부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스스로 단기 디자인 전문과정을 마쳤으며 LG전자 디지털디자인연구소를 직접 챙긴다. LG전자는 한국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디자이너 출신인 김철호 디지털디자인 연구소장을 2000년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현대자동차 정몽구(鄭夢九) 회장도 비슷하다.

현대차는 지난해 11월 3000만달러를 투자해 미국 캘리포니아에 현대 기아 디자인센터를 착공했다. ‘미국에서 잘 팔리는 자동차를 만들려면 미국인 취향에 맞는 디자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정 회장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소형가전 전문생산업체인 카이젤은 주력제품인 가습기의 디자인을 투박한 박스형 몸체에서 부드러운 튤립 모양으로 바꾼 뒤 물건이 달릴 정도로 주문이 폭주하고 있다. 카이젤의 올 1∼3월 매출은 108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갑절로 늘었다.

한국 기업들 사이에 ‘디자인 혁신’ 바람이 불고 있다.

CEO들이 디자인 관련 부서를 직접 챙기며 디자이너 우대정책을 펴는가 하면 디자인 부서를 확대하는 등 디자인 부문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다. 디자이너들이 제품기획 단계에서부터 상품화까지 제품 개발의 전(全)단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디자이너 전성시대’라는 말도 나온다.

▽기술보다 디자인이 우선〓얼마 전만 해도 기업에서 디자인 부서는 제품기획 부서에서 주문한 대로 ‘껍데기’를 만들어주는 ‘하청 부서’에 불과했다.

하지만 요즘은 디자인 부서가 소비자조사를 거쳐 만든 디자인에 맞춰 기술이 개발된다. 디자인이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국내외 주요 기업의 기술 수준이 ‘오십보 백보’가 되면서 디자인이 제품 차별화의 핵심 요소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

삼성전자 디자인센터 윤지홍 상무는 “과거에는 ‘외관(外觀)은 기능에 따른다’는 말처럼 디자이너가 엔지니어를 쫓아가야 했다”며 “하지만 1980년대가 ‘개발의 시대’, 1990년대가 ‘마케팅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디자인의 시대’”라고 설명했다.

LG전자 디지털디자인연구소 심재진 상무는 “LG전자는 매년 디자인연구소가 제안하는 디자인에 맞춰 신제품을 개발하는 경우가 많다”며 “앞으로는 기술보다 디자인이 우선시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자이너 전성시대〓디자인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기업 내에서 디자이너와 디자인 관련 부서의 위상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

현대차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디자인 부서의 책임자가 부장급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디자인 부서 책임자를 부사장급으로 격상시켰다. 현재 현대차에는 박종서 부사장, 차종민 상무, 김영일 이사, 윤선호 이사대우 등 4명의 디자이너가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한용외 가전담당 사장이 디자인센터장을 직접 맡고 있고 89년 80명에 불과했던 디자인 인력도 현재 279명으로 늘었다. 2004년까지는 360명으로 늘릴 계획.

패션전문업체인 에스콰이아는 디자이너의 해외 출장이나 연수 등 디자이너 육성 지원자금이 회사 전체 연구개발(R&D) 예산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디자인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던 중소기업들이 디자인의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중소기업의 의뢰를 받아 디자인을 개발하는 디자인전문업체도 성업 중이다.

한국디자인진흥원에 신고된 산업디자인전문회사는 2월 말 현재 709개. 이 가운데 73%인 518개사가 99년 이후 설립된 것으로 최근 3년간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미흡〓기업들이 디자인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일찌감치 디자인산업을 육성한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디자인진흥원 정경원 원장은 “국민소득이 올라가면서 소비의 고급화 추세에 맞춰 기업들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며 “하지만 한국의 디자인 수준이 아직 선진국에 비해 낮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산업자원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디자인 전문가 300명은 ‘한국의 디자인 경쟁력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의 70∼80%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경희대 산업디자인학과 최명식 교수는 “외형을 보기 좋게 만드는 디자이너들의 감각은 많이 좋아졌지만 제품 컨셉트를 잡는 능력은 선진국에 비해 아직도 부족하다”며 “의사들이 외과보다 안과나 피부과를 선호하듯이 디자이너들도 엔지니어링이나 마케팅 등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해야 하는 산업디자인보다 컴퓨터그래픽 디자인 쪽으로 몰리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주요 기업의 디자인 인력 증가추이 (단위: 명)
기업1980년대1990년대2000년대
LG전자110185220
삼성전자 80200279
현대자동차140180327
쌈지 5 60 80
에스콰이아 0 63 76
퍼시스 14 32 52
한샘 10 18 45
동아연필 10 15 20
현대차의 2000년대 디자인 전문인력은 기아차 인원 포함.
자료: 산업자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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