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CEO 화법'을 보면 조직문화 보인다

  • 입력 2002년 5월 19일 17시 59분



올해 삼성그룹 순이익이 사상 최대 기록을 세울 거라는 장밋빛 전망이 나돌던 3월 말. 삼성그룹의 태평 무드에 난데없이 ‘사이렌’이 울렸다.

“잘 나간다고 자만하지 말라.”

화기애애하던 사장단 회의장에 전해진 이 한마디는 사장단은 물론 삼성의 전 임직원, 삼성의 순항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을 긴장케 했다.

사이렌의 발신지는 그룹 오너인 이건희(李健熙) 회장. 그의 한마디 이후 삼성은 다소 느슨해졌던 신발 끈을 다시 조이고 있다. 전문경영인에 의한 자율경영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필요할 때면 오너가 훈수를 하는 삼성 특유의 경영 스타일을 보여주는 이 대목은 한편으론 ‘이건희식 화법’의 권위를 다시 확인케 했다.

▽‘이건희 화법’의 본질〓이 회장의 한마디는 삼성에서 절대적인 ‘어명’이다. ‘부드럽지 못한 눈빛, 다듬어지지 않은 언사’(유순하 저서 ‘삼성 신화는 없다’)의 이 회장이 어눌한 어투로 한마디 할 때, 왜 그 말은 그렇듯 무게를 갖는가.

오너라는 후광이 작용한 건 물론이다. 그러나 많은 오너 중에서도 유난히 그가 입을 열었다 하면 주목받는 것은 그의 독특한 화법, 치밀한 상황 연출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이건희 카리스마’의 출발점은 그의 은둔자적 스타일에서 형성된 신비감이다.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그레타 가르보가 절정의 순간에 은둔함으로써 신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나 대중가수 서태지가 팬들과의 접촉을 극소화한 것이 그의 카리스마를 증폭시킨 것과 같은 이치다.

이 회장도 대중 앞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의 항공 재벌 하워드 휴스만큼은 아니지만 ‘칩거형’이다.

그는 자택에서 머물며 비디오와 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한다. 그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직관력으로 필요할 때 ‘화두’를 들고 나온다. 혼자 연구하면서 오랫동안 응축한 걸 한꺼번에 터뜨리는 식이다. 그러니 다들 그의 한마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회장의 화두의 주제는 ‘위기’다. 93년 6월7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론’이나 3월의 ‘자만하지 말라’는 얘기의 골자도 위기론이다. 게다가 그는 이를 ‘총수의 고뇌’라는 형식을 통해 절박하게 전달한다.

“일제 VCR와 국산 VCR를 손수 분해해 본 다음에 삼성의 수준을 알아차려 위기를 느끼게 됐다” “위기의식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대목에선 권위가 전해진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는 이 회장의 위기의식론에 대해 ‘완벽증 콤플렉스’로 본다(남자 vs 남자). “오너의 완벽증 콤플렉스가 삼성의 엘리트주의를 자극하면서 임직원들의 공감대를 얻는 것”이라는 얘기다.

▽경영자 화법은 기업 경영스타일〓이 회장의 예처럼 최고경영자의 화법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성격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룹의 경영문화를 형성한다. 오너 경영 전통이 강한 한국의 대기업들은 특히 그 같은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오너 일가들은 선대의 스타일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다. 정몽구(鄭夢九) 현대차 회장은 이론보다는 행동형이다. 아버지 고(故) 정주영(鄭周永) 전 명예회장의 스타일을 이어받아 불도저 스타일이라는 평이다. 부하 직원들이 어려운 말로 보고를 하면 “쉬운 말로 해”라고 할 만큼 간단 명료한 걸 좋아한다. 그의 말도 에두르거나 포장하지 않고 명쾌한 메시지를 제시한다.

특히 정 회장의 말은 정 전 명예회장의 작고 이전과 이후에서 대조를 보인다. 96년 취임할 때 “아버지가 살아계신데…”라면서 기자회견도 하지 않았던 그지만 아버지 사후 그는 할 말을 활발히 하고 있다.

SK는 토론문화가 발달했다. 이는 고 최종현(崔鍾賢) 전 회장이 토론을 즐겼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문경영인인 손길승(孫吉丞) 회장이나 2세 경영자인 최태원(崔泰源) 회장 모두 이런 기질을 이어받았다. 신입사원과의 대화도 즐기는 손 회장은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그 질문의 뜻을 되묻고 메모한다. 최근 “부당한 정치자금은 주지 않겠다”는 말로 파장을 일으킨 것도 메모 습관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회장은 젊은 경영자답게 파워포인트를 활용하는 등 논리적 실증적 화법을 구사한다.

구본무(具本茂) LG 회장은 부친인 구자경(具滋暻) 전 명예회장처럼 소박 소탈한 스타일이다. 그룹의 조직문화도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구 회장은 최근엔 ‘1등주의’를 강조하며 자신과 그룹 기업문화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신격호(辛格浩) 롯데 회장은 잘 알려진 철저한 실리형. 계열사 사장들에게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할 만큼 화법도 꼼꼼하다.

▽구조조정형에서 겸손한 리더로〓미국의 경우 90년대 구조조정기에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몰아붙이는 경영자들이 각광을 받았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라고 했던 앤디 그로브 인텔 전 회장이나 제너럴 일렉트릭의 잭 웰치 회장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호황을 맞으면서 좀더 민주적인 리더가 주목받고 있다. 유명한 경영분석가 짐 콜린스가 겸손한 리더의 전형으로 제시한 킴벌리 클라크사의 다윈 스미스 같은 사람이 그 같은 신(新)경영자형의 하나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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