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차분해서 좋아요. 저는 요란한 건 싫거든요.”
LG전자의 백색가전을 책임지고 있는 김쌍수 디지털 어플라이언스 사장은 가끔 백화점 가전매장을 찾아 고객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물론 고객은 상대방이 사장인지 모른다.
김 사장은 대부분 경남 창원공장에서 지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에 올라오면 꼭 영업현장에 나가본다. “경영자가 현장에 나가봐야 소비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택시 타고 여론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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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를 막론하고 ‘현장 경영’을 강조하는 최고경영자(CEO)가 각광받고 있다. 소비자의 기호를 파악하기 위해 영업 현장을 직접 뛰기도 한다. 때론 ‘내부 고객’인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외부 고객을 만족시킨다며 사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한다. 또 해외를 자기 집 드나들 듯하고 공장의 생산라인을 하루에 한 번은 돌아본다.
CEO가 소비자를 우선 생각하면 직원들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밖에 없다. CEO가 직원을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생각하는 기업에서는 자발성과 창의성이 생겨난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CEO들의 경영철학이 최근 유난히 돋보이는 것은 CEO의 역할에 따라 IBM처럼 죽어가던 기업이 살기도 하고 엔론처럼 잘 나가던 기업이 죽기도 하는 현실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이다.
▽현장이 교과서〓이계안 현대캐피탈 및 현대카드 회장은 현대자동차 사장으로 일할 때 저녁 약속이 있으면 전용 자가용인 에쿠스 대신 주로 택시를 타고 다녔다. 그는 택시운전사에게 현대차 사장 명함을 건네며 현대차에 대한 불만을 듣는 식으로 ‘현장의 소리’를 청취했다. 최근 이 회장은 고객관계관리(CRM) 파트를 직접 챙기고 있다.
만도공조의 황한규 사장은 일주일 중 절반은 충남 아산 생산공장에서 보낸다. 그는 매일 생산라인을 돌면서 작업자들이 지적하는 문제점을 경청하고 현장에서 시정한다.
김쌍수 사장이 지휘하는 창원공장에는 직원 1600명이 참가하는 300여개의 태스크포스(TF)팀이 있다. 이들은 경영 제안을 내놓고 김 사장은 이를 적극 반영한다.
LG증권 서경석 사장은 최근 3개월 동안 전국 115개 지점을 둘러봤다. LG텔레콤 남용 사장은 한 달에 일주일은 고객센터 영업지점 교환국 등에 나가본다.
▼1년에 100일 외국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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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의 3분의 1은 해외에서〓‘해외가 내 집 안방’같은 CEO도 적지 않다.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은 지난해 100여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해외 전시회에 참가하거나 바이어를 만나기 위해서다.
셋톱박스 제조업체 휴맥스의 변대규 사장도 마찬가지. 그는 해외 출장 중 하루 평균 3명의 바이어를 만난다. 독일의 ‘용산전자상가’인 미디어마트 등에 들러 전자 유통 현황도 확인한다.
구자홍 LG전자 부회장도 일년에 100여일을 해외에서 보낸다. 노기호 LG화학 사장은 한 달에 한 번은 해외사업장을 점검한다.
▽내부 고객을 사로잡아라〓3월말 취임한 허태학 신라호텔 사장은 지금까지 점심시간이면 직원들과 ‘도시락 미팅’을 하고 있다.
서울프라자호텔의 황용득 총지배인은 직원 600명 가운데 절반 정도의 이름을 모두 외운다. 1999년 3월 프라자호텔 경영책임을 맡은 뒤 무려 1년에 걸쳐 직원들과 회식 자리를 가지며 직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한 결과다.
진대제 사장은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디자이너들과 한 달에 한 번 도시락을 먹는다. 이 자리에서 임원급의 발언은 철저히 제한된다.
▽떠오르는 해외 CEO〓최근 미국에서는 엔론 사태를 계기로 대기업 CEO 가운데 막대한 스톡옵션을 받고 있지만 과대평가된 이들이 많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상대적으로 현장경영을 중시하고 새로운 리더십을 보이는 CEO들이 주목받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복사전문 업체인 킨코스사 개리 쿠신 사장. 그는 지난해 8월 취임한 뒤 6개월 동안 200개 이상의 매장을 방문했고 2500명 이상의 종업원을 만났다. 이 결과 그는 컬러복사, 컴퓨터 출력, 제안서 제본 서비스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고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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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용품을 파는 스테이플사 론 사전트 사장은 취임 첫날 매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사전트 사장은 이 경험을 한 뒤 고객층을 새로 분석했으며 일반인보다는 장기 거래하는 중소기업 위주로 품목을 바꿔 사무용품 업계의 불황을 극복하고 있다.
셜리 틸만 프린스턴대 총장은 지난해 총장이 된 뒤 매주 학생들과 모임을 갖고 있다. 이 모임을 통해 돈을 많이 버는 것에만 관심이 높던 학생들의 ‘월스트리트 지향적 사고(思考)’를 공공부문과 비(非)영리부문으로도 돌리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밖에 알프레드 창 BEA 시스템 사장, 제임스 파커 사우스웨스트항공 사장 등도 현장경영을 중시하는 CEO로 꼽힌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망해가던 IBM은 자기 시간의 80%를 고객에게 바친 루 거스너라는 걸출한 CEO 덕분에 새로운 기업으로 탄생했다”며 “고객과 시장과 종업원을 중시한다는 원칙에 충실한 CEO는 기업을 오래 존속시키고 이는 ‘사회선(社會善)’을 실현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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