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기업들 ‘끼리끼리’ 뭉쳐야 산다

  • 입력 2002년 7월 7일 17시 19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도산대로를 따라 청담동으로 가다 보면 영화사 간판이 자주 눈에 띈다. 강제규필름을 비롯해 제니스픽처스, 태원영화사, 기획시대, 영화마을 등. 영화사뿐만 아니라 매니지먼트사와 음반사, 컴퓨터그래픽사, 녹음실, 디자인회사, 투자사 등 수백 개의 영화 관련 회사들이 모여 있다.

1998년 종로에서 신사동으로 회사를 옮긴 ‘영화마을’의 안동규(安東圭) 대표는 “음식점에서, 심지어 길을 걷다가도 연예인이나 음반사 관계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면서 “함께 차라도 한 잔 들면 서로 이해가 깊어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등 좋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영화 산업뿐만이 아니다. 첨단산업이든 전통산업이든 관련 기업들이 모여 있으면 필요한 소재나 부품, 기술, 인력 등을 쉽게 구할 수 있고 도로 전기 기자재 등도 함께 쓸 수 있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 스웨덴의 시스타 사이언스파크, 프랑스의 소피아 앙티폴리스 등이 성장의 모델로 등장하면서 ‘산업 생태계’로서의 ‘산업 클러스터(Cluster·군집)’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예전의 산업집단이 도로 물류 등의 하드웨어에 중점을 두었다면 새로운 ‘혁신 클러스터’는 지식과 정보의 교류, 네트워크를 중시한다.

▽대덕밸리의 실험〓대전 대덕연구단지에는 연구원이 1만6000명, 이 가운데 박사급은 4500여명이 있다. 한국 이공계 박사의 10%가 모여 있는 셈.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등 국책연구기관은 18개, 벤처기업도 800여개가 모여 있다.

대덕밸리를 찾는 해외기업 최고경영자들은 두 번 놀란다. ‘어떻게 이 작은 벤처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나’에 놀라고 ‘왜 대기업들과 연계해 상품화가 이뤄지지 않나’에 다시 놀란다.

대덕단지에서는 그동안 하나로원자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아리랑위성 등 몇 가지 성과물이 나왔다. 그러나 내년에 30주년을 맞는 이 연구단지의 기술과 인재 등 잠재력에 비하면 과실이 너무 적다.

실리콘밸리의 하명환 한인IT포럼 회장은 “대덕은 가공하지 않은 원석(原石)”이라면서 “원석을 소비자가 원하는 보석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책 연구기관과 대기업 연구소, 벤처기업들 사이에 정보교류가 없고 머니, 마케팅, 매니지먼트의 3M이 없는 것이 대덕의 한계다.

▽핵심은 네트워크다〓대덕단지의 네트워크화에 관심을 쏟고 있는 이석봉(李石鳳) 대덕넷 대표는 “실리콘밸리의 힘은 연구성과와 경영노하우를 활발히 교환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고 말했다. 휴렛팩커드 시스코시스템스 등 대기업들과 수많은 벤처기업, 투자사 등이 공식 비공식적 교류를 함으로써 이노베이션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대기업들은 한국과학기술의 두뇌인 대덕에서 무슨 연구가 이뤄지는지 모르고, 대덕 안에서도 바로 옆의 연구소나 기업이 갖고 있는 기술이 뭔지 모른다.

대덕에서도 최근 몇몇 벤처기업들을 중심으로 네트워크화가 이뤄지고 있다. 대덕밸리를 네트워크화해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대덕넷’이 2000년 출범했고 지난해에는 정보기술(IT) 벤처기업 20여개가 힘을 모아 ‘대덕밸리 협동화 단지’를 만들었다.

인바이오넷 등 15개 바이오벤처들은 ‘대덕 바이오 커뮤니티’를, 원자력연구소 출신 기업인들은 ‘아톰 밸리’를 만들었다. 삼성전자도 올 들어 실무팀이 대덕을 몇 차례 방문해 미래 핵심 기술을 찾고 벤처기업들과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공단의 진화〓한국에는 클러스터의 잠재력을 지닌 곳들이 많다. 서울의 남대문 동대문시장, 대구의 섬유산업, 울산의 자동차 조선산업, 창원 마산의 기계 정밀기기 항공산업 등.

그러나 대덕이 연구단지만 모여 있는 것이 한계라면, 대부분의 산업단지는 단순한 생산공장에 머물고 있는 것이 문제다.

국토연구원의 권영섭(權英燮) 박사는 “과거의 산업단지가 하드웨어를 공유하거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직적 협력관계에 머물렀다면 클러스터는 업체와 기관들간에 상호 학습, 노동력 이동 등을 통해 자생적인 혁신 능력을 갖춘 군집”이라고 말했다.

자연발생적인 클러스터로 알려진 실리콘밸리도 초창기에는 인위적 노력이 있었다. 기술의 산업화에 관심을 가진 미국 스탠퍼드대의 프레드릭 터먼 교수가 대학 안에 ‘스탠퍼드 리서치 파크’를 만들고 제자들에게 창업하도록 한 것이 시초다.

▽국가경쟁력의 화두, 클러스터〓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1996∼2000년 ‘혁신 클러스터 포커스 그룹’을 만들어 경제발전의 새로운 모델로 클러스터를 제시했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전국의 산업 집적지를 지도로 만들고 이들을 강화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미 하버드대의 마이클 포터 교수는 “경쟁력 있는 나라들의 핵심은 몇 개의 지역 클러스터”라면서 스웨덴, 핀란드의 IT 클러스터가 국부(國富)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한국은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 건설교통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클러스터를 모색하고 있으나 지역별로 통일된 비전 제시자가 없는 것이 문제. 삼성경제연구소의 복득규 박사는 “몇몇 대기업이 국가경제를 이끌던 시대는 지나갔다”면서 “대학 대기업 벤처기업이 상생(相生)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을 때 10년은 물론 100년 먹고 살 것이 나온다”고 말했다.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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