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리서치 하면 대우증권 출신”

  • 입력 2002년 7월 29일 17시 24분


증권회사는 사람 장사다. 그 중에서 애널리스트로 불리는 연구인력이 핵심이다. 업체들은 힘이 닿는 대로 ‘스타 연구원’을 스카우트하고 있다. 그 스타들 대부분은 어디서 어떻게 성장했을까. 정답은 ‘대우증권’이다.

한국 증권가에서 대우증권 출신을 빼고는 리서치를 말할 수 없다. 이남우 신성호 김석중 윤두영 윤재현 박준식 윤세욱 윤용철 강운성…. 주요 9개 증권사의 리서치 책임자가 대우 출신이다.

‘베스트 연구원’은 말할 것도 없다. 업종별 분석에서도 뛰어나다고 하면 거의 대우에서 잔뼈가 굵었다.

▽1등 프리미엄, 자긍심과 애사심〓지난번 대우증권의 신입사원 모집 때 연구원 지원자는 무려 1000여명에 이르렀다. 면접담당 간부가 물었다. “여기 왜 오려고 하죠? 대우는 기우는 회사인데. 더 좋은 데 갈 것이지.”

한 지원자가 말했다. “연구원을 한다면 대우에서 배우겠습니다.”

또 다른 지원자는 “대우에서 3년만 고생하면 업계 베스트가 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3년. 대우증권의 위상도 많이 추락했고 많은 사람들이 대우증권 리서치팀에서 떠났다. 그런데도 아직 대우증권은 증권업계 리서치의 ‘빅3’ 중 하나다. 떠난 만큼 또길러낸다.신기한 일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대우증권 리서치팀이 전 업종의 베스트를 휩쓸었다. 우리증권 신성호 이사는 “90년대 후반까지 대우 리서치는 여의도의 법이고 질서였다”고 말한다.

비록 최근 베스트 연구원의 수가 줄었지만 대우 리서치팀은 여전히 1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도제식 교육〓어떤 비결이 있을까. 대우증권 리서치팀에는 도제(徒弟)식 교육 방식이 자리잡고 있다. 흔히 ‘사수’ ‘부사수’로 불리는 선배와 후배가 1 대 1로 교육한다. 사수가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부사수를 가르친다.

도제식 전통은 이미 은퇴한 심근섭 전무에서 출발한다. 그의 부사수였던 전병서 부장(현 리서치센터장)은 ‘빨간 펜’으로 당시 교육을 떠올렸다.

“나이 30줄에 빨간 펜으로 머리를 얻어맞으며 혼나니까 죽고 싶더라고요. 제가 쓴 리포트에는 심 전무가 그어놓은 빨간 펜 자국뿐이었죠.”

전 부장은 “그러나 제 자리로 돌아오면 마음이 달라졌다”고 털어놓았다. “당대 최고의 대가에게 나 같은 실무자가 머리를 맞아가며 배우는 게 행복했다”는 것.

이 전통은 요즘도 마찬가지다.

입사한 지 4년째인 노미원 연구원은 빨간 펜만 보면 옛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10일 동안 5번이나 같은 리포트를 고쳐 쓴 적이 있습니다. 고치고 지적받고 또 고치고.”

무작정 혼내는 것은 아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아낌없이 준다. 심 전무가 도입한 미국식 기업분석기법에다 수십 년간 쌓은 자료들, 정보를 얻는 방법까지 전해준다. 심 전무는 은퇴 후 국립 중앙도서관에 칩거하고 있지만 매년 스승의 날이면 그를 찾는 연구원이 적지 않다.

정창원 연구원은 “대학에서 6년 공부하는 것보다 회사에서 2년 교육받는 게 낫다”며 “도제식 교육은 애정이 필수”라고 말했다.

▽함께 간다, 돕고 기다리는 문화〓연봉에 따라 평가받는 개인주의 시대다. 그러나 리서치팀의 고참들은 업무의 30%를 후배 교육에 쏟으라고 요구받는다. 교육에 쏟는 노력은 평가받는다. 전 부장은 “후배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우 리서치를 수십 년간 업계 최강으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잘라 말했다.

리서치 분야에서 독불장군은 없다. 반도체 담당 연구원이 반도체만 알아서는 곤란하다. 금리 외환 시황 국제 등 다른 분야를 알아야 제대로 연구 보고서를 쓸 수 있다. 정보공유가 필수인 셈이다.

이진혁 연구원은 “요청하면 서로 자료를 주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고 말했다. 축적된 자료가 바로 무기인 이 업계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정 연구원은 “후배나 동료들에게 애써 만든 자료를 주기는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고 물어보면 자세히 가르쳐주는 윗사람이 있다”며 “리서치 업무를 하기에는 대우가 가장 편하다”고 말했다.

노 연구원은 “기술세미나를 통해 서로 공부한 결과를 공유하도록 한다”며 “잘할 때까지 도와 함께 성장하려는 문화”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K연구원은 대우를 떠나면서도 후배 연구원에게 자신이 쌓은 자료를 모두 주기도 했다.

사실 ‘조직 내 정보공유’와 ‘열린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요즘 유행하는 경영혁신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대우는 이 같은 덕목을 오래전부터 체화(體化)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도기와 위기〓그들은 최고의 연구원을 키우는 시스템과 문화를 믿고 있다. 이는 애사심과 자긍심의 기반이다. 그러나 대우 리서치에도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올 들어 연구원들이 대거 다른 증권사로 떠나면서 베스트 연구원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

대우도 인력 누출로 외부인력 충원에 나서게 됐다. 순혈주의를 포기한 셈. 이는 도제식 교육을 통한 자체 인력양성, 자료의 공유, 끈끈한 팀워크 등을 흔드는 일종의 도전이다.

그러나 연구원들의 반응은 의외로 단순했다. 대부분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우증권 리서치팀은 선진 시스템을 가장 먼저 들여와 한국적 문화에 접목했다.

프리랜서 시대를 맞아 대우는 또다시 ‘21세기의 한국형 기업문화’ 모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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