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의 엘리베이터 업체인 미국 오티스의 한국법인 LG오티스는 자체 개발한 에스컬레이터용 구동기를 올해부터 ‘기계산업의 고향’이라는 독일에 수출하고 있다. 이 회사는 4월 60대를 처음 선적하는 것을 시작으로 연간 3000대(1000만달러 상당)를 독일 오티스에 공급한다.
볼보건설기계코리아가 만드는 굴착기는 한국 업체들이 만드는 다른 굴착기에 비해 미국 시장에서 2배 가까운 가격에 팔리고 있다.
쓰리엠은 한국에 ‘아시아 디스플레이 연구센터’를 세워 디스플레이 부품 분야의 아시아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본사에서 개발한 기술로 한국에서는 생산만 하고 있는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들과 달리 한국을 ‘기술 개발의 거점’으로 삼고 있는 외국 기업들이다.
이들이 한국에 R&D센터를 세워 성공을 거두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한국 기술력에 대한 평가〓미국 오티스가 1999년 말 LG산전의 엘리베이터 부문을 인수할 당시 임직원들 사이에는 오티스가 한국의 연구센터를 폐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미국 독일 스페인 일본 등 4곳에 R&D센터를 두고 있던 오티스는 이들 센터에서 개발한 기술을 전 세계 현지법인에 공급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R&D센터의 문을 닫으면 연간 수십억원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오티스는 인수 직전 ‘한국 기술이 세계 무대에서 통할 리 없다’는 내부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티스가 인수 직후 조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연구센터에 축적된 기술 수준이 의외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결국 한국의 연구센터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후 LG오티스는 안전사고를 방지하는 도어시스템, 엘리베이터의 진동을 줄여 승차감을 높여주는 가이드 롤러 등 각종 첨단기술을 개발해 미국 유럽 등지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LG오티스 R&D 연구소장인 서종호 상무는 “오티스는 한국 R&D센터를 지난해 11월 세계 5번째의 글로벌 R&D센터로 지정, 매년 10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술개발 프로세스의 선진화〓스웨덴 볼보가 98년 7월 삼성중공업의 기계사업부문을 인수해 볼보건설기계코리아를 설립한 이후 R&D센터의 업무 프로세스를 바꾸기 시작했다.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몇 단계에 걸쳐 철저하게 검토함으로써 R&D가 반드시 회사 수익에 기여하도록 한 것.
연구소는 기술개발에 착수하기 전에 타당성 검토 보고서를 제출해 본사 경영진의 기술개발 승인을 받아야 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후에는 세부 개발계획 보고서를 제출해 이번에는 본사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시제품이 나오면 세계 각지 볼보 현지법인들의 마케팅, 애프터서비스 등 분야별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 양산을 하기 전에는 또 본사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의사결정 과정은 과거에 비해 2, 3개월 길어졌지만 돈이 되는 기술만 개발할 수 있게 됐다.
이 회사 진종언 R&D센터 이사는 “과거에는 연구소와 경영진의 즉흥적인 판단에 따라 시장과 생산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기술이 개발돼 회사 이익에 도움을 못 주고 사장(死藏)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귀띔했다.
▽본사 연구소를 한국으로 옮긴다〓하니웰은 우주항공 자동차 빌딩 등의 자동제어장치 부문 세계 1위 기업. “한국에 고급 인력이 풍부한 데다 R&D 인프라가 훌륭하게 구축돼 있다”며 올 1월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R&D센터를 한국으로 이전했다.
이 회사 이승신 전무는 “한국의 고급 연구인력 보수는 연 3만5000∼4만달러로 미국이나 유럽의 70% 수준”이라며 “인건비는 낮지만 제품개발 능력이 선진국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데다 대학이나 연구기관들의 질적 수준이 높은 것도 하니웰이 R&D센터를 이전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됐다.
이 전무는 “미국의 다른 기업들이 하니웰의 연구소 이전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며 “하니웰의 성공 여부에 따라 한국으로 연구소를 옮기는 기업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다국적 기업 R&D센터 이전의 최종 목적지가 한국’이라고 결코 자신할 수 없다는 사실.
모토로라코리아 정갑근 전무는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으로 R&D센터를 옮겼다면 임금이 더 싼 중국으로 못 옮길 이유가 없다”며 “기술력에서의 절대 우위를 지키기 위한 정부와 민간 차원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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