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제조업체 영창악기도 5차례에 걸쳐 래커를 바르는 도장(塗裝)작업은 손으로 한다. 도장의 두께가 두꺼워지면 맑은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과 차이가 있다면 붓으로 하던 것을 지금은 스프레이로 뿌리는 것이다.
▽정밀도가 생명〓로만손이 수작업에 의존하는 것은 자동화 설비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10여년 전 규격 부품을 컨베이어시스템을 통해 조립하는 방식으로 대량생산했지만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로만손의 김광성 개발담당본부장은 “수작업으로 조립한 제품의 불량률은 0.1%미만으로 자동화보다 불량률이 훨씬 낮다”고 설명한다.
공장의 자동화 비율이 높아지고 컴퓨터가 생산 시스템 전반을 관리하는 컴퓨터통합시스템(CIM)이 도입되고 있지만 정밀도가 중요한 산업의 핵심공정은 여전히 기술자의 손끝에서 이뤄진다.
한국 기업의 평균 자동화율(전체 제조 공정 중 자동화 공정이 차지하는 비율)은 80년대 30∼35%, 90년대 35∼45%에서 2000년대 들어 50∼60% 수준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시계, 안경테, 액세서리 등 정밀도가 중요시되는 제조 분야의 자동화율은 20%를 밑돈다. 기업들에 자동화를 지도하는 한국생산성본부 생산품질 컨설팅팀의 최진선 부장은 “미세한 수작업 공정을 자동화하면 불량률이 높고 가격도 비싸 성공률이 높지 않다”고 말한다.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도 한몫〓최근 산업의 큰 추세는 다품종 소량생산. ‘공산품’이 아닌 ‘패션’으로 인식되는 제품이 늘어나면서 한 가지 모델을 대량 생산할 필요성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자동화 설비 투자에 대한 수요도 감소하고 있다.
로만손의 김 본부장은 “만들어내는 모델은 600∼700개인 반면 모델당 생산량은 3000개 미만”이라며 “대당 1억원이 넘는 자동화 설비 투자는 타산이 맞지 않다”고 말한다.
소니 도시바 NEC 등 일본의 전자업체들도 90년대 불황을 겪으면서 대량생산 체제를 포기하고 수작업 비중을 크게 높이면서 생산성이 오히려 높아졌다. 일본 고다에 있는 소니의 비디오 카메라 공장은 150m 길이의 컨베이어 라인을 뜯어내고 3명이 한 팀이 돼서 완제품을 조립하는 수작업 체제로 전환하면서 생산성이 30% 이상 향상됐다. 고객 주문이 적은 제품 라인에서 그때 그때 사람을 빼내 인기 제품 쪽에 집중 배치하므로 인력 활용도가 높아지고 필요한 만큼만 만드니까 재고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자동화 지도과의 김병규 지도위원은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의 기업이 섣불리 자동화 설비를 도입하면 기계를 놀리는 경우가 잦다”면서 “한 생산라인에서 다양한 모델을 생산하는 자동화 설비인 유연조립생산시스템(FMS)이 있기는 하지만 설치비용이 워낙 비싸 중소기업으로서는 투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수작업 전문인력 부족〓서전에서 핵심 수작업인 가공·용접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85년 회사 창립 후 15년 넘게 이 분야를 맡은 전문인력이다. 로만손에서도 가장 미세한 공정이 요구되는 시침·분침 조립 작업은 10년 이상의 숙련공들이 담당한다. 수작업 업체들에 가장 큰 고민은 지금의 전문인력이 퇴진하면 그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것. 매년 직원 채용시 수작업에 지원하는 신입·경력 사원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 동서울대학에 시계공학과 설립을 지원하며 전문인력 양성에 나선 김기문 로만손 사장은 “해외에서 한국의 수작업 제품은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에 중급이나 고급 가격에 판매된다”면서 “수작업 산업도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벤처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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