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워싱턴의 계좌에 매월 쌓이는 돈은 180달러. 회사측이 종업원 납입액의 50%를 얹어주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위탁운용사인 피델리티가 제시하는 9개의 투자대안 중 이번에는 ‘성장주펀드’와 ‘템플턴해외시장펀드’를 선택했다. 지난 6개월간 투자했던 ‘피델리티 중기채권펀드’와 ‘미국증시 인덱스펀드’의 수익률이 기대에 못미쳐 펀드를 갈아탄 것.
위 사례는 미국의 기업연금제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 기업연금제는 관련 세제 혜택이 내국세법 401(k) 조항에 명시돼 있어 흔히 ‘401(k)’로 불린다.
한국에서도 기업연금제 도입 논의가 뜨겁다. 정부는 연말까지 정부안을 확정해 내년 2∼3월 국회에 상정할 방침이다.
기업연금제는 근로자의 노후생활 안정과 자본시장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묘안.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근로자는 기업이 도산해도 마지막 3년분 퇴직금을 최우선으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퇴직금은 회사 재산을 담보로 잡은 채권자들에 순위가 밀려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기업연금제가 도입돼 근로자가 자기 명의로 계좌를 관리하면 회사가 문을 닫더라도 퇴직금을 건질 수 있다.
아울러 주식이나 채권에 연금보험료가 대량 투자되면 자본시장도 건실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의 퇴직일시금제도에서는 대부분의 퇴직금 재원이 기업 운영자금으로 쓰이거나 은행 계좌에서 잠자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한국식 기업연금제 정착을 낙관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도입 논의의 난맥상〓확정갹출형과 확정급부형 중 무엇으로 할지에 대해 노사간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확정갹출형에서는 미국의 401(k)처럼 회사나 근로자가 매달 내는 금액이 먼저 정해진다. 근로자는 이 돈을 책임지고 굴리며 실적에 따라 퇴직 이후 받는 연금액이 달라진다.
현행 퇴직금제도와 비슷한 확정급부형에서는 근로자가 받는 연금액이 먼저 정해진다. 기업이 연금보험료를 모두 내고 그 돈을 굴린다. 회사는 운용수익률이 낮으면 모자라는 금액을 채워 연금액을 맞춰야 한다. 회사가 파산하면 연금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주식처럼 가격변동이 심한 상품에 대한 투자를 금지하고 정부가 지급보장 장치를 마련해놓고 있다.
재계는 기업의 자금 부담이 적은 확정갹출형을, 노동계는 연금액이 확실히 보장되는 확정급부형을 선호한다.
양측 이견을 조율해야 할 정부는 “너희끼리 알아서 정하라”면서 한 발 빼고 있다. 관심의 초점이 ‘어떻게 하면 기업 부담을 줄이면서 근로자 노후생활을 보장할 수 있을까’하는 근본문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줄곧 기업연금제 도입을 증시대책의 일환으로 제기해왔다.
증권연구원 고광수 연구위원은 “기업연금제는 어디까지나 근로자들의 노후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며 증시부양은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기업연금제 정착은 말처럼 쉽지 않다”면서 “도입 초기엔 기업연금제를 도입할지, 도입한다면 어느 방식을 선택할지를 기업 수준의 노사간 합의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증시부양, 저절로 되는 건 아니다〓정부 관계자들은 기업연금제가 도입되면 1조원 이상의 투자자금이 증시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효과를 당연시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증권가 견해다.
미국의 경우 기업연금제 도입은 증시 자금을 늘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2000년 말 1조7000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401(k) 자금 중 72%가 주식(주식형펀드+자사주)에 투자됐다. 이는 개인금융자산 중 주식 비중이 25%를 넘는 미국인 특유의 공격적인 재테크 성향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의 경우 개인자산 중 주식 비중은 6.6%에 불과하고 예금 및 채권이 70%를 넘는다. 삼성증권 김승식 조사팀장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기업연금 투자비중은 개인자산의 투자비중과 비슷한 모습을 보일 것”으로 전망한다.
동원증권 강성모 투자분석팀장은 “주식투자에서 은행 예금금리 이상의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어야 투자자들의 보수적인 태도가 바뀌고 연금 재원이 증시로 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PCI투신운용 강창희 사장은 “저금리시대에는 재테크 중심을 저축에서 투자로 옮겨야 안정적인 노후가 보장된다는 점을 근로자들이 깨달음과 동시에 운용사들은 투자자의 입맛에 맞는 상품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일관된 운용철학으로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연금 형태 비교 | ||
구분 | 확정급부형 | 확정갹출형 |
펀드의 형태 | 종업원 전체 신탁계정 | 근로자 개인별 신탁계정 |
연금보험료 기여 주체 | 회사 | 근로자+회사 |
연금보험료 규모 | 변동 가능 | 확정 |
연금보험료 운용 주체 | 회사 | 근로자 |
물가 및 투자수익률 위험부담 | 회사 | 근로자 |
기업 자금 부담 | 운용수익률에 따라 변동 | 단체협약에 따라 고정 |
근로자 자금 부담 | 원칙적으로 동일 | 원칙적으로 동일 |
연금보험금 | 확정 | 운용실적에 따라 다름 |
규제 및 감독 | 많이 요구됨 | 거의 필요 없음 |
선호 근로자층 | 위험기피적인 장기근속자 | 의욕적인 단기근속자(젊은층) |
다른 연금상품으로 이전 | 복잡함 | 쉬움 |
이철용기자 lc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