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A사는 자사의 전기제품을 유럽에 수출하려다 현지 바이어로부터 계약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국제표준화기구(ISO)의 품질보증 규격인 ‘ISO 9000’ 인증이 없어 제품의 품질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인증마크가 품질, 기술, 안전성 등을 판단하는 ‘제품의 신분증’처럼 통용되는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제아무리 좋은 제품도 인증마크 없이는 시장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 및 국가간 표준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증마크도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다.
송인섭 산업기술시험원 전기전자 본부장은 “각종 인증제도가 무역 장벽화하면서 국가의 주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정부와 기업의 투자 확대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인증마크를 알면 제품이 보인다=PC용 DVD플레이어가 처음 나온 1995년. 당시 한국의 PC 업체들은 DVD 고유의 5.1채널 방식 음향 규격인 돌비디지털(DD) 인증마크를 쓰지 못해 속을 끓여야 했다.
제조업체들이 돌비연구소의 까다로운 인증절차를 통과하지 못해 제품을 개발해 놓고도 시험을 받는 수개월간 인증마크를 제품에 붙일 수 없었다.
한국휴렛팩커드가 판매하는 액정모니터 뒷면에는 무려 20개 가까운 품질인증 마크가 붙어 있다. 중국 공장에서 해외 수출용으로 일괄 생산하다보니 인증마크 수가 늘어난 것.
이 중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의 인증마크는 FCC 전자파적합성 테스트를 통과했음을, 미국 환경보호국의 ‘에너지스타’ 마크는 에너지효율 기준을 만족시킨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 유럽연합(EU) 국가에서 안전 환경 위생분야 제품에 부착을 의무화하고 있는 ‘CE ’마크와 한국 전파연구소의 정보기기 전자파적합등록 마크(MIC)도 들어 있다. 각국 전자파적합성 시험 인증마크만 해도 일본(VCCI) 호주·뉴질랜드(C-Tick) 독일(TUV) 멕시코(NOM NYCE) 폴란드(B) 러시아(PCT) 등의 것들이 포함돼 있다.
▽활발해진 기업들의 대응=제조물책임법(PL법) 시행 이후 각종 인증제도에 대한 기업들의 자세도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모든 전자제품에 요구되는 전자파 적합성 인증만 해도 나라별로 인증마크를 받으려면 제품당 5만달러 이상의 비용이 든다”며 “인증 획득에 드는 비용이나 노력은 해외사업을 위해서는 달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미국 보험협회안전시험소의 안전 규격 인증인 ‘UL(Underwrite Laboratories Inc)’ 마크를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 국내 처음으로 받아 해외 진출 확대를 기대하고 있다.
세계 3대 휴대전화기 제조업체로 떠오른 삼성전자는 지난해 미국과 영국의 국제 공인 시험기관 자격을 받아 주요 국가용 수출 제품을 자체 시험만 거쳐 판매하고 있다.
한국가스안전공사는 최근 가스보일러 분야의 유럽연합 인증마크인 ‘CE’ 시험기관으로 지정돼 국내 업체가 유럽에 가지 않고 국내에서 CE 인증마크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인증도 산업이다=전문가들은 산업부문 연구개발(R&D)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들의 공통점으로 각종 인증 업무에 대한 원스톱 서비스 구축을 꼽는다. 선진국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증 업무를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하고 투자에 힘을 쏟아왔기 때문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전화 한 통화면 접수에서 인증마크 획득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한 번에 처리하는 서비스가 보편화돼 있다. 스웨덴에서는 전기기기시험승인협회(SEMKO)가 자국 기업들을 위해 이 같은 시험인증 서비스를 전담하고 있다.
80∼90년대 초반 유럽과 일본은 품질표준 시스템 시장을 놓고 치열한 선점 경쟁을 벌였지만 유럽이 이기면서 국제표준 시장의 주도권은 급속히 유럽쪽으로 기울었다. 당시 품질관리(QC) 전사적품질경영(TQM) 등 일본의 품질 표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장 지배력과 우호 국가 확보 경쟁에서 유럽의 ‘ISO’에 밀렸다. 이에 따라 유럽의 ISO 표준 인증을 받은 제품은 세계 교역량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수출 성패를 좌우하는 국제 인증제도는 ISO 규격 외에도 ‘QS 9000(미국 자동차산업협회 품질표준)’ ‘CE(유럽연합 적합성 인증)’ ‘UL’ 등으로 계속 늘고 있다. 최근엔 ‘TL 9000(미국 정보기술업계 품질규격)’을 비롯해 ‘OHSMS(산업안전보건)’ ‘ISMS(정보보안)’ ‘AS 9100(항공우주부품)’ 등도 나와 세부 업종 및 기업경영 서비스 분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명선 한국PL센터 전문위원은 “정보기술 분야의 경우 ISO 등 국제인증 규격이 1300가지나 되지만 KS 인증규격은 498가지에 불과하다”며 “한국이 국제경쟁에서 뒤지지 않고 동북아 R&D허브가 되려면 인증기술의 고도화가 시급하다”고 밝혔다.
김태한기자 freewill@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