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회의에서는 당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내걸었던 명칭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건설 추진위원회’에서 ‘국가 건설’이라는 단어가 삭제됐다. 영문 명칭도 ‘The Northeast Business Center’에서 ‘A Northeast Business Hub’로 바뀌었다. ‘중심’으로 해석되는 ‘Center’ 대신 ‘거점’이라는 뜻의 ‘Hub’를 사용했으며 정관사 ‘The’를 부정관사 ‘A’로 바꿔서 ‘유일한 중심지’는 아니라는 의미를 강조했다.
▽냉담한 주변국들〓국가 핵심 프로젝트의 명칭이 다소 모호하게 바뀐 배경은 동북아 중심을 자처하는 주변국들의 항의 때문. 중국 일본 등은 그동안 여러 차례 비공식 채널을 통해 “중심국가라는 단어를 쓰면 주변국의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견해를 전달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일부 국무위원들도 “우리가 중심이면 ‘주변’이 된 다른 나라들은 기분이 어떻겠느냐”면서 “위원회 명칭이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일부에서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동북아 건설위원회’라는 명칭을 대안으로 거론했으나 이번에는 “주변국 배려도 좋지만 명칭을 완전히 뜯어 고칠 필요까지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동북아 경제중심 추진위원회’ 수준에서 절충을 본 것.
▽실속 없이 명분만 강조된 정책 추진=지난해 초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기본구상이 발표된 후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 계획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뚜렷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11일 한국경영학회 주최로 열린 ‘동북아 경제중심의 꿈과 현실’ 심포지엄에서도 이 사안은 중점적으로 거론됐다. 정구현 연세대 경영학부 교수는 “중심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이웃나라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우리가 중심지가 될 수 있는 길은 금융 정보 통신 등 고부가가치 전략산업에서 ‘허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라며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중국 및 일본 등 아시아 주요 거점들과의 좋은 국제분업 구조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포용’ 전략〓올 2월 싱가포르 정부는 ‘비전 2018’ 프로젝트를 들고 나왔다. 앞으로 15년 후 아시아의 중심지를 고수하려는 싱가포르의 6대 중점 과제를 담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동북아 중심국가’ 계획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내용은 다르다.
‘비전 2018’은 제1 과제로 “우리 기업들이 주변국에 적극 진출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대상 국가를 ‘비행거리 7시간 내의 국가들’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중국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중국을 적극 ‘포용(engagement)’해서 중심지의 위치를 놓치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무역연구소의 송권호 박사는 “인근국의 견제를 줄이려는 움직임”이라며 “그래야만 중국을 비롯한 다국적 기업들을 붙잡아둘 수 있다”고 말했다.
▽진정한 거점국가가 되려면=‘동북아 중심국가 계획’이 표류하고 있는 사이 중국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한국의 1·4분기(1∼3월) 외국인 직접투자 실적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8.4% 줄어든 11억800만달러인 반면 중국의 1∼2월 외자유치 실적은 지난해에 비해 60% 정도 늘어난 235억달러였다. 한국에 지역본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기업은 지난해 말 현재 2개인 반면 중국은 2000년 이후 30여개의 지역본부를 싱가포르, 홍콩 등지에서 유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용준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는 “‘중심국가’가 되겠다는 명분을 버리고 실리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중국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진정한 ‘중심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중국, 일본은 물론 싱가포르, 홍콩 등을 아우르는 ‘다중심적 네트워크(Multi-centered Network)’를 만드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구현 교수도 “아시아 지역 여러 개의 중심지들이 각각 경쟁력 있는 산업 위주로 재편되고, 한국은 이들 중심지들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간사(幹事)’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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