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초국적기업이라도 사업본부 자체를 해외로 옮기는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니다. 이 사례는 필립스가 갖고 있는 글로벌 경영에 대한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88서울올림픽 이후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도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필립스처럼 글로벌한 시각을 갖고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진정한 글로벌 경영이란?=LG경제연구원 홍덕표 연구위원은 “진정한 글로벌 경영이란 기업이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보고 전체의 효율성을 생각해 생산, 마케팅, 인적자원관리 등의 경영 활동을 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싼 임금을 찾아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거나 물건을 팔기 위해 해외 시장을 노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 펜실베이니아 경영대학원(와튼스쿨)의 하워드 펄머터 교수는 글로벌 경영의 유형을 본국중심주의, 현지중심주의, 세계중심주의로 나눴다.
고려대 장세진 교수(국제경영)는 “본국중심과 현지중심 경영은 하나를 취하면 다른 쪽을 포기해야 하는 상쇄(trade-off) 관계에 있다”며 “글로벌 경영에서 세계중심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설명했다.
세계중심주의적인 글로벌 경영에선 국적에 상관없이 현지에 가장 유능한 인력을 파견하는 인적자원관리 정책을 편다. 또 가장 유리한 곳에서 물적자원을 구매하고 본사와 해외 자회사는 잦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본국중심주의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경영의 주요 의사결정이 본국에 집중돼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일본 전자업체들도 한국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 시장이 워낙 탄탄하고 제품, 시장, 기술에 대한 정보수집 역시 일본 내에서 하는 게 가장 쉽기 때문에 이런 형태를 취한다.
▽전 세계적인 효율성을 추구하라=필립스 모니터 사업본부는 대만으로 이전하면서 제품개발 인력의 10%만 옮겨가고 나머지는 모두 현지에서 채용했다. 성과는 놀라웠다. 매출이 35∼40% 증가했고 재고가 줄어들면서 현금 흐름이 좋아졌다. 필립스는 비디오와 DVD사업부를 오스트리아에서 싱가포르로 이전했고 오디오 사업부는 홍콩에 사업본부를 두고 있다.
필립스코리아 유재순 이사는 “필립스의 글로벌 경영에 정해진 원칙은 없다. 시장을 중시해야 하면 시장으로, 부품이 중요하면 부품이 있는 곳으로 본사를 옮기는 등 가장 효율적인 곳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것뿐이다”라고 소개했다.
소니의 경우 사업본부별로 사업의 중심 지역이면서 시장 정보를 수집하기 쉽고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쉬운 곳에 본사를 둔다. 전자산업은 일본 내에 본사가 있지만 멀티미디어와 영상 분야는 미국에 있는 자회사가 본사 노릇을 한다. 국제 금융의 경우 뉴욕과 런던의 자회사가, 일부 연구개발(R&D) 부문은 미국 자회사가 본사다.
▽국내 기업의 수준은?=LG전자는 국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지난해 중국 베이징(北京)에 연구R&D센터를 설립했다. LG측은 중국의 정보통신 및 가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선 현지 완결형 연구개발 체제를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중국을 제2의 내수시장으로 키워나갈 야심을 갖고 있는 LG는 ‘중국형’ 디지털 제품을 현지에서 개발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LG전자의 사례는 전략을 세우고 그에 맞게 글로벌 경영을 실천하는 드문 경우다.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영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국내 기업의 해외 자회사들은 현지인 채용 규모를 늘리고는 있으나 대부분 생산직에 그치고 있다.
장 교수는 “한국 기업 가운데 제대로 글로벌 경영을 하고 있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단언했다. 단순히 돈을 취급하는 경리 부문만 해도 현지인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더욱이 최고경영자(CEO)로 내세우는 경우는 없다는 것.
홍 연구위원은 “전자산업처럼 해외사업 비중이 높으면 정보수집, 연구개발, 인력확보에서 한국의 경쟁 우위가 낮은 경우가 있다”면서 “관행적으로 본국중심의 경영을 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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