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노블리안스]고기정/FTA와 농림부의 고민

  • 입력 2003년 7월 13일 18시 26분


10일 오후 과천 농림부 청사에 있는 장관실 앞에는 전경 20여명이 보호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농민단체들이 김영진(金泳鎭) 장관과 면담을 하는 중에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불미스러운 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농림부가 요청한 건 아닙니다.

한때 삭발까지 해 가면서 농민의 이익을 지켰던 김 장관이 이처럼 군색한 처지에 몰릴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농촌 현실의 절박함을 보여줍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만 해도 그렇습니다. 국가간 통상 교섭은 세계적 대세입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일본과 싱가포르의 FTA, 미국과 이스라엘 요르단 칠레, 호주와 뉴질랜드 등은 모두 FTA를 통해 무역 블록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도 고르고 고르다 피해보다는 이익이 더 많을 것 같은 칠레를 시험용으로 삼아 FTA 체결을 시도했습니다.

반론의 여지가 있지만 한-칠레 FTA가 체결되면 10년간 무역수지가 43억달러 개선되지만 농가피해는 4억9000만달러 정도라는 게 정부측 계산입니다. 여기에 쌀 사과 배는 관세 철폐 대상에서 뺐습니다.

하지만 농민들은 시설포도 재배농가 등은 사실상 경영을 포기해야 해 직접 피해액이 2조1000억원에 이른다고 계산합니다. 더구나 이들 농가가 다른 농작물을 재배하게 되면 공급 과잉으로 연쇄피해가 생겨 간접피해까지 합하면 천문학적인 손실을 볼 것이라 주장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FTA는 국가 전체로 보면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이익이라는 게 통상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하지만 농민들의 ‘생존’을 담보로 한 것이지요.

예순이 넘은 농민들에게 ‘벤처농업으로 전환하라’ ‘영농규모를 확대해 경쟁력을 키우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헛소리일 뿐입니다.

이쯤 되면 농업문제는 경제학이 아닌 사회복지학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한국 농민들에게 경제원칙 운운하는 건 극히 일부의 기업농을 제외하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김 장관의 고민도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고 농림부를 출입하는 기자도 이 부분에서는 더 이상 합리성을 들이밀 수 없게 됩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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