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서 다국적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세계 무대에서 세계적인 인재들과 함께 ‘세계경영’을 하는 것은 멋진 일 아닙니까. 다국적 기업을 활용하면 한국기업이 해외에 진출하는 노력의 100분의 1로 세계 경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 “이 사장이 그것을 몸소 보여줬다”고 치켜세웠다. 이 사장이 1996년부터 싱가포르에서 GE메디컬 아시아태평양지역 총괄사장을 한 것을 일컫는 말.
이 사장이 화답했다.
“한국인 가운데는 정말 훌륭한 인재가 많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국제감각도 뛰어나고…. 제가 싱가포르에 있을 때 한국인들을 주요직에 많이 등용했는데 욕심 같아서는 더 늘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라서 오해받을까 봐 못했죠.”》
삼성출신의 이 사장은 89년 삼성-GE 합작회사 사장에 부임해 적자 사업을 단숨에 흑자로 돌렸다. 그후 이 사장을 눈여겨 본 GE측이 “인재교류 차원에서 이 사장을 빌려달라”고 삼성에 요청해 GE메디컬을 맡겼다. 98년 구조조정 바람이 불자 GE는 “이 사장을 아예 GE 사람으로 삼겠다”라며 그를 데려간 후 GE코리아의 ‘차기 CEO’로 지목해버렸다.
두 사람은 “젊은이들이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가 됨으로써 과거 광개토대왕이 다스리던 것보다 더 광대한 지역을 경영하려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한국에서 다국적 기업의 역할로 옮겨갔다.
“다국적기업들은 주로 한국시장에 제품을 팔기 위해 진출하지 않나요”하고 기자가 끼어들었다.
“GE코리아의 연간 매출 30억달러 가운데 10억달러는 한국의 소재 부품들을 수출하는 겁니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시장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판매법인도 많이 만들지만 요즘은 부품생산, 연구개발, 인력활용 등 아웃소싱을 점점 중시하죠. 다국적기업은 투자와 고용으로 한국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기술이전, 첨단경영기법 전수 등 많은 도움을 줍니다.”(이 사장)
“산업용 펌프에서 세계 일류인 그런포스는 최근 부도난 한국 중소기업을 인수했습니다. 만일 이 투자가 중국으로 갔다면 회사는 그냥 사라지는 겁니다. 요즘은 국민도 한국에서 한국사람을 고용해 활동하는 기업이야말로 ‘국내 기업’이라는 인식이 높아졌다고 봅니다. 경제통계도 국민총생산(GNP)보다 국내총생산(GDP)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이 회장)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마치 입을 맞춘 듯했다. 두 사람은 고려대 국제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함께 수학(修學)한 동창생. 이 사장이 싱가포르에 있을 때도 이 회장이 출장가면 찾아가는 등 친분을 쌓아왔다.
이 사장은 “이 회장은 바쁜 CEO활동을 하면서도 박사학위를 받는 등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정이 많다”고 칭찬했다.
그러자 이 회장은 “이 사장은 회사를 다니면서 한국외국어대에서 영어연수를 받기 위해 집을 서울 중곡동에서 이문동으로 옮겼을 정도”라며 “사실은 내가 이 사장님을 벤치마킹한 것”이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3∼4년에 한번씩 최고경영자과정 등을 다니며 재충전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외국계 기업의 CEO로서 한국 땅에서 사업하기는 어떨까. 민관(民官)이 한 목소리로 ‘다국적기업들의 아시아·태평양지역 본부를 한국에 유치하자’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허브(hub·중심축)로 만들자’고 외치는 요즘이다.
이 사장은 “외국기업들은 아직도 남북문제와 노사문제를 가장 걱정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중국이 블랙홀처럼 세계의 다국적기업들을 빨아들이고 있다”면서 “다국적 기업의 입장에서 어떤 곳이 최적 투자지인가를 냉정하게 살펴 한국의 사업여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한국기업에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 사장은 삼성물산, 이 회장은 유원건설. 직접 겪어 본 한국기업과 외국기업의 문화는 어떻게 다른가.
“CEO를 비롯한 한국의 지도층들은 발이 땅에 닿지 않습니다. 비서가 없으면 전화도 못 걸 정도지요. 그만큼 현실을 모릅니다.”(이 사장)
“한국 대기업들은 아직도 회의할 때 직위에 따라 자리를 고정하고 임원이 해외 나가면 공항까지 마중 나오는 등 불필요한 의전(儀典)이 많습니다.”(이 회장)
두 사람은 “기업문화를 유연하고 열린 문화로 바꿔나가야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고 기업의 경쟁력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이채욱 GE코리아 사장
△1946년 경북 상주 출생
△71년 영남대 법학과 졸업
△72년 삼성물산 입사
△89년 삼성-GE 조인트벤처 대표
△96년 GE메디컬 부문 아시아 태평양지역 사장
△2002년 GE코리아 사장
■이강호 다국적기업協회장
△1951년 출생
△73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81년 유원건설 입사
△90년∼현재 한국그런포스펌프 사장
△2000년 동국대 경영학 박사
△2001년 한국-덴마크 상공·문 화포럼 회장
△2002년 다국적기업 최고경영 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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