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민족 된 배달의민족[현장에서/곽도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7일 03시 00분


곽도영 산업1부 기자
곽도영 산업1부 기자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게르만 민족.’

국내 대표 유니콘 기업이자 코리안 스타트업 신화였던 배달의민족(배민)이 독일계 기업에 팔렸다는 소식에 업계에선 이런 우스개가 돌았다. 잘 알려진 배민의 광고 슬로건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배달의민족’의 패러디다.

대중과의 접점이 많고 관심도가 높은 기업이었던 만큼 이번 배민 매각 소식에 많은 이들이 적잖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우리가 배달의 민족이라더니 왜 하필 독일 기업이냐” “이제 한국 시장 외국계에 다 빼앗겼으니 수수료 올려도 꼼짝 못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왜 배달의민족은 게르만 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한국 대기업들은 왜 배민을 사지 못했을까. 딜리버리히어로가 배민의 가능성을 봤다면 우리 기업이라고 못 봤을 리 없다. 하지만 ‘문어발식 사업 확장’ ‘골목시장 파괴’ 등 한국에서 대기업이 그럴싸한 기업을 인수하는 데 대한 시선은 아직 싸늘한 구석이 있다.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감수할 만큼 대기업들이 플랫폼 산업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측면도 있다. 실제로 이번에 확인된 배민의 몸값은 4조8000억 원으로 이마트의 시가총액(3조7000억 원)보다 비싸다.

그럼 왜 국내 투자사들은 배민을 사가지 못했는가. 배민의 탄생을 이끈 데는 분명 본엔젤스, 스톤브릿지 등 토종 투자사들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룡’이 된 배민을 선뜻 사줄 만한 규모의 금융자본이 국내에는 없다. 이번에 배민을 사간 딜리버리히어로의 뒤에는 ‘아프리카의 소프트뱅크’라 불리는 내스퍼스가 있다. 쿠팡이츠의 뒤엔 손정의 회장의 비전펀드가 있었다. ‘코리안 소프트뱅크’라 할 만한 투자사가 한국에선 아직 나오지 않았다.

빅딜 소식이 전해지기 2주 전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는 공개 석상에서 국내 자본시장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국내외 투자사, 스타트업 대표들이 총출동한 국내 최대 스타트업 행사 ‘K-스타트업 컴업 2019’ 기조연설에서 “이제 코리안 유니콘만 나올 게 아니라 한국이 투자한 유니콘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배민이 국내에서 인수돼 토종기업으로 남았다면 어땠을까. 한국은 국가별 배달앱 시장 규모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곳이다. 이 시장에서 배민은 56%의 점유율로 2위와 큰 격차를 유지하는 압도적 1위였다. 총알만 받쳐줬다면 해외 자본으로부터 한국 시장을 지켜냈을 것이다.

이번 매각 소식은 한국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에 희망과 경각심을 동시에 안겼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인수합병 경쟁 속에서 국경은 이미 의미가 없다. 한국이 투자한 유니콘의 탄생이 다음번 지면을 장식하길 바란다.
 
곽도영 산업1부 기자 now@donga.com
#배달의민족#유니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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