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을 찾았다. 1년 전 고 임세원 교수가 사력을 다해 달렸을 복도에는 이제 보안인력 한 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진료실 안에는 방화유리로 된 호신장비가 보였다. 병원 관계자는 “진료실 내 비상벨과 비상구는 사건 당시에도 있었다”며 “임 교수님도 비상벨을 누르고 비상구로 탈출하셨지만 범죄를 피하진 못하셨다”고 말했다.
지난해 마지막 날 임 교수가 진료 중이던 환자의 흉기에 안타깝게 생명을 잃자 의료계와 국민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그 이후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병원 보안을 강화하고 의료인을 폭행한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한 ‘임세원법’(의료법 개정안 등)이 올해 국회를 통과했다. 100병상 이상의 병원급 의료기관은 모두 경찰청과 연결된 비상벨을 설치하고 1명 이상의 보안인력을 둬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의료인 폭행사건이 이어지면서 의료현장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 못했다. 이달 16일 충남 순천향대부속 천안병원에서는 사망한 환자 유족들이 신장내과 교수를 진료실에 가두고 무차별 폭행하는 일이 있었다. 이 병원 응급실과 정신과 진료실에는 비상벨, 비상구 등 안전시설이 있었지만 다른 진료실에는 없었다. 두 달 전에는 서울 노원구 을지대 을지병원에서 정형외과 환자가 진료실에 난입해 칼을 휘둘러 의사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을지병원 역시 응급실, 정신과, 병동에만 비상벨을 둔 상태였다. 법에 따르면 비상벨과 보안인력 배치는 병원 자율이다.
그렇다고 보안인력 배치를 무한정 늘릴 수도 없는 일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시행 첫해 병원 보안인력 지원금으로 들어가는 돈만 연간 수십억 원으로 추산된다.
보안시설이 완벽하다고 사건을 다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인 을지병원 이창훈 교수는 “환자가 들어오자마자 칼을 휘둘러 비상벨이 있었다 해도 누르거나 도움을 받을 순 없었을 것 같다”며 “불시의 공격을 완력이나 도구로 막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의료인 폭행 예방을 위해 처벌의 실효성을 높여야 하고 이를 위해 의료법 중 ‘반의사불벌죄’(피해자 의사에 반하면 처벌할 수 없는 죄)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후약방문’ 대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권준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은 “대형병원 쏠림, 낮은 수가, 비급여 진료 증가 등 의료계의 해묵은 문제들 탓에 의료서비스에 대한 환자들의 불만이 급증하고 있다”며 “의사와 환자 간 신뢰가 무너진다면 그 어떤 대책에도 폭행 사건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방향이든 앞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인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은 절대 없도록 더 촘촘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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