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대선 때 기업인들은 주로 누구를 지지했는가’가 화제가 되자 한 중견기업체 사장이 한 이야기다. 짧은 이 한마디엔 ‘기업은 세상 흐름에 적응하기 마련’이라는 처세의 지혜가 녹아 있다. 정치나 정부는 기업이 적응해야 할 경영환경인 것이다.
이는 신뢰경영이 ‘기업 내부에 국한된 과제’가 결코 아님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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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법인세, 번만큼 내라 |
▽정경유착의 전통=외환위기 전 한국의 고도성장 비결은 ‘친밀한 기업-정부 관계’였다. 좋은 측면에서는 ‘정경 협조’이지만 부정적인 면에서는 ‘정경 유착’으로 규정됐다.
미국 하버드대 실비아 맥스필드 교수는 “민간과 정부 엘리트 사이의 신뢰관계 덕분에 상호 교류에 따른 비용이 줄고 장기적 안목을 가진 투자가 가능했다”고 과거 한국의 정부-기업관계를 평가했다.
자율적 시장경제가 부담하는 시행착오 비용을 줄인 것. 대신 한국 정부는 순응하는 기업들에 투자 자금을 공급하고 그에 따른 투자리스크를 국민에 떠넘기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취약성 드러낸 한국 모델=이러한 한국형 경제발전 모델은 90년대에 들면서 그 취약성을 드러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며 시장이 대외에 개방되면서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직접 개입이 더 이상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 것.
여기다 ‘관료엘리트가 민간엘리트보다 우수하다’는 가설이 깨졌지만 ‘강한 관료’들은 상황변화에 대응한 제도개혁을 소홀히 하고 권한 유지에만 신경을 쓰기도 했다.
97년 외환위기 직전 재정경제부의 권고에 따라 한국은행이 300억달러 이상의 보유 외환을 국내 금융기관에 맡겨 국제 조달금리보다도 낮은 금리로 기업에 대출토록 한 일은 ‘친기업적 정책’이 국민경제에 해악을 끼친 대표적 사례. ‘은밀하고 부패한’ 정부-은행-기업관계 덕분에 한보철강은 92년 말 이후 산업, 제일은행으로부터 천문학적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
정부-기업관계의 이러한 일탈현상은 외환위기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정부·기업 양자 모두 떳떳해야=정부-기업관계는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정부 규제나 기업의 지배구조가 국제 기준을 좇아 바뀌고 있다. 금융시장이 은행 중심에서 자본시장 중심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변화의 요인.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샌디에이고) 스티븐 해거드 교수는 “정부-기업관계의 핵심은 정부와 민간 대기업들이 더욱 건강하고 균형 잡힌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면서 “기업은 재산권에 대한 강력한 보호를 받아야 하며, 정책수립과정에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대기업의 전횡도 대응세력에 의해 제도적으로 감시되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기업과 정부가 모두 스스로 떳떳해야만 기업활동과 규제정책의 정당성이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용기기자 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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