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은 늘었는데 이 때문인지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빙빙 도는 것 같다는 평가가 많다.” (김대환·金大煥 인하대 교수·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간사)
▼연재물 목록▼ |
- <11>부익부빈익빈 부동산시장 |
현 경제상태를 두고 재정경제부 등 경제부처에서는 ‘경기는 순환하기 마련이고 지금은 침체국면일 뿐’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안이한 진단이라는 것이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물론 지표도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 몇 개월 동안 경제성장률, 생산 및 도소매 증가율, 기업 및 소비자 심리 등 각종 주요 경제지표들은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다. 여기다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정부 정책’ 요인은 지표들보다 더 큰 불안변수로 꼽히고 있다. ‘위기’론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
▽헷갈리는 정책=이러한 지적은 기업인들은 물론 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첫 경제자문회의에서도 전직 경제부총리 등 경제원로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날 경제 원로들이 대통령에게 집중적으로 주문한 것은 “중심을 잡아달라”는 것.
사공일(司空壹·전 재무부장관)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부총리가 경제정책 조정기능을 책임질 수 있도록 정부조직을 바꾸어야 하고 경제수석제도도 부활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웅배(羅雄培) 전 경제부총리도 “경제부총리 중심으로 조율되는 시스템을 운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제는 재정 금융 조세 부동산 기업정책 등 여러 가지 정책수단들이 조화를 이루며 일관되게 움직여야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사정은 그런 것 같지 않다. 김진표(金振杓)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경제팀장이라고 하지만 장관급 실세들이 비서실과 청와대직속 3개 위원회 및 태스크포스에 포진해 있다. 또 한국은행 총재, 공정거래위원장, 금융감독위원장도 독립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법인세율 인하, 삼성전자의 수도권 내 증설 허용,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 등 중요한 정책결정을 둘러싸고 불거진 불협화음들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에 따라 ‘정책수립 따로, 집행 따로’의 엇박자가 경제 정책의 현주소라는 목소리가 많다.
▽‘집단 이기주의’에 휘둘리는 정책=새 정부 들어 두드러지게 높아진 것은 노동계 등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
두산중공업의 파업을 시작으로 철도파업, 화물연대 파업의 결과가 ‘강하게 밀어붙이면 정부도 밀리더라’는 선례를 남겼다. 이후 조흥은행 매각은 청와대의 불필요한 개입으로 사태가 더 꼬였다. 더욱이 노조가 이달 25일 총파업을 선언함에 따라 파업의 위험은 그대로 남아있어 정부 모양새만 우습게 됐다. 화물연대의 사태해결방식에 고무된 택시 버스 레미콘업계도 똑같은 지원을 요구하며 파업도 불사하겠다고 정부에 으름장을 놓고 있다.
대통령의 입에서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가 됐지만 이를 자초한 것은 대통령 자신을 비롯한 소위 ‘코드가 맞는 세력’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연구위원은 “경제를 분석하고 전망하려면 최소한의 법적 안정성이 기본전제”라며 “요즘에는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경제 전망이나 처방을 내놓기도 몹시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대화와 타협’이 민주국가에서 중요한 문제 해결방식이지만 법 역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국회에서 토론과 협상을 통해 만들어진 ‘대화와 타협’의 결과물”이라며 “목소리가 큰 소수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떼법’이 힘을 발휘하고 청와대나 일선 행정부처가 그것을 용인하는 이상 안정적인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경제는 전문가에게 맡겨야=‘이념의 과잉’과 ‘전문성의 부족’이 경제를 어렵게 했다는 지적도 많다. 사회 정치 분야를 넘어 경제분야까지 이른바 ‘대통령의 코드’라는 이념성이 강조되면서 경제현장 전문가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
안종범 교수는 “지금 한국경제는 진보냐 보수냐, 분배냐 성장이냐, 친노동이냐 친기업이냐 등 이념의 갈림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락하느냐 새롭게 도약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면서 “경제를 낭떠러지로 떠밀고 있는 것은 이념논쟁과 이에 편승한 집단이기주의 및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라고 강조했다.
전주성(全周省·경제학) 이화여대 교수도 “현 정부가 겪는 어려움의 상당부분은 신뢰의 위기”라며 “대중적인 지지도 중요하지만 경제문제는 해당 분야 전문가 그룹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한국경제 정책경쟁력 높이려면▼
최근 우리 경제는 성장이 둔화되는 가운데 기업 투자부진과 근로자 파업, 부동산 투기, 카드채 부실 등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현재 우리 경제의 위기는 경기순환의 국면에 따라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기보다는 ‘1만달러 함정’의 구조적 현상과 경제정책의 경쟁력 부재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최근 발표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세계경쟁력 보고서를 보면 정부 효율성 부문에서 한국은 59개국 중 35위였다. 싱가포르 홍콩 대만 등 경쟁국들이 10위권 내외이니 한국정부 부문의 경쟁력에 ‘적신호’가 들어온 것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21세기에 본격적으로 펼쳐질 새로운 경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공공부문의 효율을 높이고, 민간부문의 경쟁력 향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일랜드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서유럽의 최빈국이었다. 하지만 글로벌화와 유럽화를 지향하는 경제정책의 효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경쟁력을 확보했다.
싱가포르는 ‘지역 허브’로서의 위상 강화를 위해 15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 비전을 수립해 추진 중이다.
중국 또한 2020년까지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먹고살 만한 비교적 잘 사는 수준)사회 건설을 목표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확립과 경제 국제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 경제는 지난 한 세대 동안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압축성장을 해 왔으며 여기에는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부가 직접 나서기보다 각 경제주체들의 합리적 경제활동을 유도하여 성장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의 경쟁력을 높여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정책조정 과정이 더욱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팀의 역할분담과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 또 정부 부처간에 정책과 관련된 정보공유가 확대되어야 한다. 참여정부 들어 경제정책 결정과정에 참여자의 폭이 확대된 것은 바람직하지만, 정교한 정책조정 과정을 통해 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둘째, 정부와 이해당사자와의 협상은 ‘공익 증대’를 위한 문제해결 과정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책담당자는 아우성치는 소수의 단기적 이익보다 말 없는 다수의 장기적 편익을 우선하는 ‘사심 없는 조정자(honest broker)’가 돼야 한다. 대화와 타협도 이 같은 원칙 위에서 진행돼야 한다.
셋째, 경제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해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일관성이 없으면 정책 불신과 경제 불안을 초래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의 지적대로 신뢰야말로 노동, 자본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넷째,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시장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시장원리는 경제주체의 행동규범으로, 자원의 최적배분을 이뤄내기 위한 전제이다. 참여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를 살리려면 궁극적으로 경제정책 코드가 항상 시장에 중심을 맞춰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시장원칙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경제정책은 글로벌 시각에서 추진돼야 한다. 국제규범에 부합하고 유연성을 수용하는 정책을 추진할 때 국가간 이동성이 높은 자원들을 국내에 유치할 수 있으며 참여정부가 국정 핵심과제로 수립한 동북아 경제중심 전략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로 위기(危機)는 위험(危)과 기회(機)라는 두 단어로 구성돼 있다. 올바른 경제정책이야말로 위험을 기회로 만드는 필수적 요소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경제정책의 경쟁력 제고임에 틀림없다.
현오석 무역연구소 소장
▼특별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경제부=신연수 임규진 홍찬선 김광현 김태한 황재성 박중현 홍석민 신치영 이헌진 이나연기자
▽사회1부=정용균 강정훈 조용휘 정승호 지명훈기자
▽사회2부=차준호 남경현 황금천기자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