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달러서 주저앉나]<5>정치는 5000달러 수준

  • 입력 2003년 7월 4일 18시 42분


《컴퓨터 모니터를 생산하는 대우루컴즈의 윤춘기(尹春淇) 사장은 중국의 물류(物流) 시스템만 생각하면 속이 터진다. 중국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시에 있는 이 회사 공장은 부품을 납품받는 데 한국에서보다 시간이 2∼3배 더 걸린다. 완제품 수출 비용도 모니터 1개에 1달러 정도 더 높다. 그런데도 윤 사장은 이달 경북 구미시에 있는 생산라인 일부를 뜯어 추가로 중국에 옮길 계획이다. 낮은 인건비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겪었던 수모 때문이다.》

▼연재물 목록▼

- <4>하향 평준화의 덫
- <3>'2030'세대 과소비 거품
- <2>노조 강경투쟁의 그늘
- <1>'내몫 챙기기' 집단신드롬

▽‘1000달러 중국’보다 못한 ‘1만달러 한국’=“본사와 연구실이 서울에 있어 공장도 수도권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청 직원들이 만나주지도 않더군요.”

윤 사장은 올해 초 공장 용지를 구하기 위해 꼬박 두 달간 경기 파주시와 김포시를 돌아다녔다. 기왕이면 LG필립스 공장이 들어서는 주변에 터를 잡는 게 유리했다.

문턱이 닳도록 시청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신도시 건설계획이 확정되면 그때 가서 말하자” “수도권 공장총량제 때문에 안 된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나마 나중에는 토지보상과 관련한 민원인들에게 밀려 담당직원과 전화 통화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결국 구미의 생산라인을 한국의 다른 지방이 아닌 중국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은 공장 용지를 50년간 공짜로 빌려줍니다. 한국에서는 돈 주고 사겠다는데도 허가를 안 내줍니다.”

▽말로만 ‘규제개혁’=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3월 11일 국무회의에서 “(경기활성화를 위해) 큰 틀에서 합리적 수준으로 규제를 완화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규제는 오히려 늘었다.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3월 1일 등록규제는 4188건이었지만 7월 3일 현재 4269건으로 81건이 증가했다. 이 기간에 정부 부처와 산하 기관 가운데 규제를 줄인 곳은 특허청(1건)뿐이다.

실제 올 들어 기업들이 요청한 수도권 공장총량제와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 준(準)조세 정비 등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기흥·화성공장 증설과 관련해 불거진 수도권 공장총량제는 완화로 가닥이 잡혔지만 현 정부가 내건 ‘국토균형 개발론’에 발목이 잡혀 있다.

출자총액제한은 기업들의 장기 투자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규제로 꼽히고 있지만 되레 더 강화될 추세다.

준조세 정비는 태스크포스가 구성됐지만 올해 말이나 돼야 운용실태 파악과 정비계획이 나올 예정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 기업은 해외로 빠져 나가고 외국인들은 대한(對韓)투자를 줄인다. 지난해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액은 27억달러로 외국인들의 한국투자액(20억달러)을 처음 넘어섰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국내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48.7%가 정부 규제 때문에 투자를 철회했거나 보류 중이라고 대답했다. 또 10곳 중 1곳은 정부가 규제를 풀지 않으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겠다는 집단 엑소더스 현상을 보였다.

▽경제목표는 2만달러, 정치수준은 5000달러=정치권의 경제 발목잡기 구태(舊態)도 여전하다.

경제는 타이밍이 생명이다. 하지만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는 여야의 예결위원장 자리다툼으로 한 달째 미뤄지고 있다. 추경 집행이 한 달 늦어지면 성장률은 0.04%포인트 떨어진다고 재정경제부는 분석했다. 적지 않은 수치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은 국회 상정도 안됐다. 국제적 망신을 당할 처지에 놓여있다. 보다 못해 노 대통령이 조속한 처리를 요청했지만 여야 모두 꿈쩍도 않고 있다. FTA의 무역수지 개선효과보다 내년에 실시되는 총선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한 야당 중진의원은 본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결정해야 할 국가정책이 한국 사회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잘 모른다. 능력과 소양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고민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목표는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이지만 정치권의 현재 수준은 여전히 80년대의 5000달러 수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운 고백’이다.


▼삼성전자 英공장 준공식 女王부부 참석 ▼

삼성전자가 멕시코 중부 케레타로에서 냉장고 에어컨 등을 생산하는 백색가전 공장의 준공식을 가진 올 4월 8일. 멕시코 일부 경제장관은 비센테 폭스 대통령에게서 질책을 받았다.

폭스 대통령은 “준공식에 직접 참석하라고 했는데 왜 다른 사람을 보냈느냐”고 꾸중했다는 것. 그는 준공식에 앞서 윤종용(尹鍾龍)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헬기를 보내 대통령궁으로 초청해 만나는 등 공장 준공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삼성전자 서종국(徐鍾局) 홍보팀 차장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삼성이 투자한 국가들의 최고지도자가 거의 예외 없이 외국기업들의 투자에 보이는 관심은 대단하다”고 소개했다.

삼성전자가 95년 영국 북부 윈야드 현지에서 가진 전자복합단지 준공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부군 에든버러 공(公)이 직접 나와 테이프 커팅을 했다. 이 밖에 윈야드 지역 왕실대표 기스버러 공과 프레이저 상공차관 및 정부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했다.

한국은 영국보다 외국인 투자가 더 필요한 나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멕시코나 영국과 같은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지난해 4월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거리 곳곳에는 ‘Welcome! Hyundai(환영! 현대)’라는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이곳에 공장을 세우기로 결정한 현대자동차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준공식을 위해 이곳을 방문한 현대차 임직원들은 감동했다.

몽고메리 시당국은 10억달러를 투자하는 현대차를 위해 그동안 약 2억5000만달러의 자체예산으로 공장 앞 도로를 닦고 상하수도를 놓아주었다. 직원 연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직원모집 공고도 시 예산으로 냈다.

현대차가 공장 앞 도로이름을 ‘현대 대로(大路·Hyundai Boulevard)’로 바꿔달라고 요청하자 시는 즉각 주민 청문회를 열었다. 주민들은 기꺼이 “OK”했다.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미국의 지방자치단체가 왜 아시아 국가 기업의 투자를 이처럼 환영하는 것일까. 현대차 공장이 들어서면 5355개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지고 총투자액도 부품제조업체를 합치면 15억달러에 달해 지역경제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중국 베이징(北京)은 현대차와 절반씩 합작한 ‘베이징·현대자동차’가 생산하는 쏘나타를 택시용도로 팔 수 있게 택시 크기 관련 규정을 아예 소형에서 중형으로 고쳐버렸다.

김조근(金照根) 현대자동차 이사는 “투자할 곳을 찾기 위해 외국에 나가 보면 국가끼리는 물론 한 나라 안에서도 지방자치단체끼리 서로 경쟁하면서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온갖 편의를 제공해 준다”고 말했다. 물론 자국 기업의 투자 확대를 위해서는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

▼기업은 生物… 활동여건 만들어줘야▼

자본주의 경제에서 정치권력은 자신의 존립 근거를 기업과의 화해에서 찾는다. 이 때문에 모든 정권은 규제 완화를 공약으로 내건다.

현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과는 규제 증가로 나타났다. 그것도 불과 4개월 만에 81건이 늘었다.

이유는 명료하다. 정책 혼선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규제 완화를 통한 경기 활성화와 기업개혁을 통한 소유구조 선진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원론적으로는 지극히 당연하고 이상적인 정책이다.

하지만 기업은 계몽론자의 교육으로 그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스스로 학습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생물(生物)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정부의 견제와 감시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적 책임에는 공정한 경쟁과 투명한 소유구조도 있지만 고용 창출과 이익 증대라는 기업 본연의 가치도 포함된다. 따라서 사회적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보장해 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의 각성과 시스템 변화도 필요하다. 최근 드러나는 모든 사회적 비리의 뿌리는 정치권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돈과 관련돼 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면 조(兆) 단위의 자금이 투입된다는 소문도 있다.

돈은 기업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정치권은 기업에 대한 규제와 특혜를 반복하고 있다.

정치자금법을 현실화하든지, 강력하게 집행하는 사회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에 대한 경제의 예속은 경제 기반을 갉아먹고 정치인을 범죄자 집단으로 만드는 형태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경제는 경제주체들의 심리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지금은 기업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 정부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 (팀장)

김광현 고기정 천광암 정미경 이은우

신치영 홍석민 이헌진 기자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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